어디로 가야하오, 낯선 이여
8월의 무더웠던 여름. 하루하루가 사람을 말려죽이려는 건지, 미친듯이 햇빛이 내리쬐던 날이 계속되었다. 뉴스에서는 94년 이후로 가장 덥다고 대서특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신나간 듯한 더위가 지속될 무렵,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듯, 내가 다니는 회사도 여름휴가 기간이였다. 정말 간만에 누리는 휴가였다.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일주일 남짓한 긴 시간동안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았다. 퇴근하자마자 씻고 곯아떨어져버리거나, 고작해봐야 주말에 찜질방에서 몸을 녹이는 것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어렵게 얻은 금쪽같은 휴가기간 동안, 다시금 무한한 출퇴근의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기 전까지 정말 열심히 휴가를 즐기겠겠노라고 다짐했다. 적어도 서울의 기온이 찜질방의 불가마 뺨치는 38'C를 기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덕분에 그 날은 집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집에서 에어컨만 틀어놓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문득 누워있다 보니, 흘러가는 시간들이 정말이지 너무도 아까웠다. 이러면 안된다, 무엇이든 해야만한다라고 끊임없이 되내였다. 어디든 떠나야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야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간만에 맞이하는 긴 휴가기간이니 이전의 여행보다는 여유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 제주도다. 언젠가 한 번 긴 시간을 투자하여 제주도의 바닷풍경을 눈에 가득 담아오겠다고, 서귀포의 올레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해안가를 길동무 삼아 정처없이 떠돌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제주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해수욕장에 돗자리 깔고 드러누워 신선처럼 바다내음을 가득 머금고 오자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비행기 티켓을 스카이스캐너에서 검색해보았다. 편도 18만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나 보다. 정말 문자 그대로 모든 항공사의 제주행 비행기의 좌석이 매진되어 버렸다. 물론 일본을 경유해서 20시간이 걸려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안가느니만 못했다. 대충 계산해봐도 왕복 비행기값에 숙소비, 기타 식비를 포함하면 70만원도 채 남지않은 내 월급통장으로는 제주도 문턱만 밟고 오겠다싶었다. 이내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에 드러누워 예전에 순천 여행을 갔을 때 사진으로 찍어온 전국 여행지도를 꺼내보았다. 여름이니만큼 바다를 볼 수 있고,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을 찾다보니 대충 여수, 강릉, 통영 정도가 남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동해안 쪽은 영 끌리지가 않았다. 1년 전쯤에 내일로 여행을 갔을 때, 정동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염없이 동해 바다를 봤던 게 생각났다. 그 때봤던 동해 바다가 뇌리에 인상깊게 새겨졌는지 강릉은 그리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지 않았다.
남해안의 통영과 여수. 전부 생소한 곳이다. 통영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충무공 이순신과 충무김밥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아는 게 없는 내 입장에서는 통영은 미지의 지역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통영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철로가 놓이지 않은 곳인지라, 오로지 고속버스로만 갈 수 있는 지역이어서 심리적인 거리는 제주도보다 더 멀었다. 더군다나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것 자체를 썩 좋아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 안전벨트를 메고 옴싹달싹도 못 한 채, 휴게소에 들르기만을 학수고대할 내 모습을 상상하니, 그리 유쾌한 여행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여수라고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여수에 아는 것이라고는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여수 밤바다'가 있다는 것과 몇 년전에 여수엑스포가 개최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는 아는 거 많아서 여행다녔나. 한참을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만 뒤적거리다 이내 포기했다. 스스로 어딜 갈지 선택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든 걸 운에 맡겨버리기로 했다. 자다 일어나서 6시 이전이면 여수행 아침 기차를 타러 용산역을 갈 것이고, 해가 중천에 뜬 늦은 아침이라면 통영가는 고속버스를 타리라. 정말이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모종의 근거로 스스로에게 선택지를 던져둔 채 잠에 들었다. 나도 몰라 젠장. 일단 자고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