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장정식의 도시, 여수
얼마나 잤을까. 문득 어깨죽지가 시렵더니 으슬으슬 추웠다. 한여름인데 춥다고?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허겁지겁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더니, 아니나다를까 에어컨이 밤새도록 냉기를 내뿜고 있었다. 안그래도 오후내내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틀어놓고 있던 것도 모자라, 취침예약기능은 어디에다 팔아먹었는지 자면서까지 펑펑 틀어버렸나보다. 다음 달에 청구될 전기요금이 조금 두려워질 때쯤,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현재 시각 오전 6시 10분. 오늘은 여수에 가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이유야 어찌됐든, 동이 트고 햇빛이 얕게 쏟아질 때쯤 일어났다. 그래, 오늘은 여수에 가자. 아는 것이라고는 장범준씨가 나지막히 내뱉은 '여수 밤바다~' 한 소절 뿐이였지만, 언제는 아는 것 많아서 갔던가. 여행은 때때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책없이 운명에 모든 걸 맡겨버리고 그저 끌리는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나야 한다. 제대로 여행정보조차 찾지 않은 채, 가방에 갈아입을 옷 한 두개와 양말 두 켤레만 챙겨 집을 나섰다.
밖은 웬일인지 비구름이 짙게 껴있었다. 간만에 보는 흐린 날씨였다. 정말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길에 하늘도 조금은 따가운 눈초리를 거두고 있었다. 용산역에 도착할 때쯤에는 짙은 비구름들 너머로 햇빛이 비췄고, 그 틈새로 차갑지 않은 빗줄기들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인가보다. 아주 잠깐 부슬부슬 내렸던 빗줄기를 등지고, 여수 가는 기차에 올라탈 때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창 밖은 다시금 뜨겁게 타올랐다.
여수가는 무궁화호에서 한참을 뒹굴뒹굴 거리며, SNS나 보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다보니 여수에 도착했다. 이 곳은 대한민국 철도의 최남단, 여수엑스포역이다. 최남단 역 답게 더 이상 철로가 연결되어있지 않고, 역사(驛舍)와 맞닿아있는 것을 보면서 작년에 최북단 역인 백마고지역을 갔을 때가 생각났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던 팻말이었다. 철원의 푸른 초원을 달리던 그 모습을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역의 승강장에 기대어 어렴풋이 떠올리던 낡은 통근열차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쓸쓸함은 여수엑스포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이 곳이 대한민국 철도의 종점이라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어딜 구경하고 돌아다녀야 할지 정하지 않았던 나는 막연히 역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역 주변이라면 어딘가에 여행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서는 무턱대고 역사(驛舍) 밖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여수엑스포역 앞에는 엑스포를 개최한 도시답게 꽤 큰 규모의 관광안내소가 있었다.
관광안내소 앞을 어색하게 어슬렁거리다 안내소 앞에 꽂혀있는 여수 관광지도를 추켜들었다. 오동도, 해상 케이블카... 역시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답게 이 곳 저 곳 매력적인 관광지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가용이 있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나 같이 오로지 대중교통과 두 발로만 여행을 다니는 입장에서 관광지도에서 추천하는 관광지들 중의 반 이상은 갔다오는 데 하루를 잡아먹는 곳에 불과했다.
오늘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비비고 놀 만한 곳이 필요했다. 관광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봐도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르겠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여행 계획에 머리를 싸매다 보니 문득 배가 고파졌다. 아침, 점심을 의도치 않게 걸러서 그런가. 역 근처인데도 뭔가 배를 채울 만한 식당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버스 정류장과 길게 늘어선 택시들이 서 있는 택시 승강장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전국 어딜 가든 역 앞에 항상 열려있었던 '24시 순대국밥' 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역 앞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집에 가고 싶었다.
막연하게 검색창에 '여수 엑스포역 맛집'이라고 검색했다. 맛집이나 일반 밥집이나 그게 그거지만, 갈 만한 식당을 찾기에는 이만한 검색어가 없다. 스크롤을 죽 내리다보니 역에서 20분 거리에 '일품 식당'이라는, 게장을 파는 집이 있다. 사실 게장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가끔 가다 밥집 같은 데에서 밑반찬으로 조그마한 양념게장 비슷한 것을 먹은 것을 제외하면 내 돈 주고 게장을 사 먹어 본 적이 거의 없다.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도 아닐뿐더러, 학생 입장에서는 꽤나 비싼 가격을 주고 먹어야 하는지라, '같은 가격이면 차라리 고기를 먹고 말지' 하는 고급 음식과도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 이거라도 안 먹으면 여수까지 와서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게 생겼다싶어 더듬더듬 버스를 타고 일품 식당까지 갔다. 머쓱하게 '안녕하세요' 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앞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아 메뉴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메뉴들이 적혀있었지만, 대부분은 2인 이상만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고 혼자서 먹을 만한 메뉴는 15,000원짜리 게장정식밖에 없는 듯했다. 혼자 여행 다니면서 조금 불편한 점이라면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2인 이상 왔을 때만 주문할 수 있는 메뉴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그 지역의 로컬 푸드 같은 경우에는 이런 메뉴가 더더욱 많아서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아서 이 음식점, 저 음식점을 검색해보고 돌아다녀야 하는 서러운 경우가 종종 있다.
한참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멍 때리고 가만히 앉아있다 보니, 하나 둘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하고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주르륵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흐음. 그냥 평범하게 생긴 게장이었다. 양념게장부터 한 입 베어 물고, 살을 슥슥 발라서 밥 위에 얹어서 한 숟갈 먹었다. 좀 짜다. 된장찌개와 계란찜을 한 숟갈 떠서 입가심을 하고 다시 간장게장에 손을 뻗어 게다리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다시 밥 한 숟갈을 했을 뿐인데 벌써 밥 한 공기가 사라졌다.
내가 밥을 이렇게 잘 먹었던가?분명 한 공기를 비웠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프고 아직 게장은 한참 남아있었다. 결국 다시 밥 한 공기를 더 시켜 먹으면서 오늘 여수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게장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도 몰랐겠지. 단언컨데 여수는 오로지 게장정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올 가치가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