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기생충이 사람 잡는 블록버스턴가?기생충을 보고 난 후:어우 소름돋아
최근 기생충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 등지에서 많은 리뷰들이 쏟아지고 있다. 특정 소재나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제각기 다른 해석들을 내놓고 있고 있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전체를 감싸는 주제의식과 이를 설명하는 소재들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영화에 큰 관싱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 내용을 곱씹어보게끔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 또한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 봉준호 감독이 영화 내에 설치해놓은 영화적 장치를 반에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만큼 해석할 키워드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생충'을 처음 보고 영화관 계단을 내려오면서 느꼈던 건 만족감보다는 내가 이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 짙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영화 속 숨은 요소들을 한 번 더 찾아보자는 마인드와 다소 혼란스러웠던 영화의 전반적인 시퀀스를 다시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다시봤다.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과 결말까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보는 '기생충'은 오히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첫 관람과 두 번째 관람에서 인상 깊게 보였던 키워드와 장면들이 사뭇 달랐다.
오줌 vs 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상태로 처음 봤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위와 아래의 수직적인 구조'를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저택을 소유한 기업 총수인 '박 사장'의 일가족들로 대표되는 최상류 층과 반지하에서 피자 박스를 접으면서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 비루하게 사는 '기택' 일가족들로 대표되는 최빈곤층으로 구성된 극단적인 계층 구조를 설정하며 영화 전반을 장악한다.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반지하, 그리고 그런 걱정은 할 필요조차 없는 2층 저택.
이렇게 설정된 인물들의 계층 구조는 사람이 사는 주거공간을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 '아래쪽'은 하층민, 혹은 비정상적이고 비루한 삶을 영위하는 공간으로 묘사되며 '위쪽'은 상류층이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개념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바닥보다도 더 아래에 있는 '기택'의반지하를 통해 하위 계층의 주거 공간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기택'의 반지하의 경우 꼽등이와 바퀴벌레가 들끓고, 전봇대 앞에서 토하고 노상 방뇨하는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봐야 하는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묘사되며, 와이파이 신호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외부로부터 소외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한참을 올라서거나 뒷산에 올라서야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 '박 사장'의 고급 주택은 영화 내에서 주거 공간을 극단적으로 양분화함으로써 계층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한다.
'박 사장'의 저택은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일반적인 중산층보다도 훨씬 더 잘 사는,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최상류층이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반지하와 고급 주택 사이에 지하실의 존재가 개입하며 영화 내 공간 구조는 그 의미가 더욱 확대된다. 반지하에서 살던 '기택'의 일가족보다도 더 아랫 공간인 지하벙커에서 살고 있던 '근세'로 하여금 인간의 주거공간 중 가장 밑바닥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당연히 들지 않고, 외부와의 소통은 형광등의 전원 스위치를 통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음식을 섭취하는 것 또한 외부에서 가져다주거나 몰래 나가서 먹는 것이 아니면 극히 제한되는, 사실상 외부로부터 고립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이로 인해 영화 초중반부까지 '아래-위', 다시 말해 빈곤층과 상류층의 계층구조로 치환되었던 공간 구조가 영화 중반부부터는 '지하-지상'으로 그 의미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계단, 그리고 와이파이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기 위해, 즉 빈곤층에서 상류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악하는 시도가 더더욱 강조되며, 이는 주로 '계단'이라는 구조물을 통해 구체화된다.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 영화 곳곳에 나타나는데, 단편적으로 영화 초반에서 '기우'와 '기정'이 핸드폰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집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장실의 변기를 올라가기 위해 만든 두세 칸짜리 계단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휴대폰을 바짝 대며, 새로 생긴 카페의 와이파이를 잡아 피자 가게의 연락을 받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것에서 '계단'이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한 장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이 문에서 시작한다.
또한 '기우'가 '박 사장'네 집의 과외선생으로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집 밖을 나서는 장면에서도 계단이 강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우'가 "아버지, 저는 이걸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내년에 이 학교 들어갈 겁니다. 미리 서류 떼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반지하의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을 다시 보면, 계단 아래에서 위로 '기우'가 올라오고 있고, 그런 기우를 어머니는 바라만 보고 있다. 즉, '기우'가 반지하에서 백수로 살던 빈곤층에서 상류층의 학생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으로 '신분상승'을 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그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은 아직 '신분상승'을 할 수 없음 또한 보여주고 있다.
서울 외곽, 경기도 어딜가도 흔히 볼 수 있는 골목길. 그래서일까. 기생충은 너무 현실적이기에 더욱 찝찝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다.
하지만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상승은 자연의 이치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물이 되었던 물건이 되었던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말은 빈곤층이 상류층으로 올라간다는 것, 소위 말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못 박는 것과 같다. 사실 이 영화의 날카로운 주제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현대 사회에서도 그렇지 않던가. 가면 갈수록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만 의사며 검사며 좋은 자리는 독차지하고, 가난하고 빽 없는 사람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그런 세태들이 반복되고 있지 않던가.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다시 영화로 돌아와 '기택' 일가족이 '박 사장'네 집에서 탈출해서 반지하로 돌아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좁은 길목들이 빗물로 불어 넘칠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도망쳐 나오는 '기택' 일가족들을 카메라는 5분가량 되는 시간 동안 '계단' 위를 내려오는 것으로 포커싱을 맞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우'는 계단 위를 쉬지 않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며, 인위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이는 '기우'가 '박 사장'네 집에서 상류층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나 여기에 어울려?"라는 대사를 통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감으로써 발생된 인위적인 것에 대한 부자연스러움을 자각했음을 알 수 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 장면. 송강호의 표정연기가 압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역전된 순환구조는 종국에는 파멸을 맞이한다. 반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벙커 밑에서 나름 안정감을 갖고 살아왔던 '근세'는 한순간에 웬 불청객들로 인해 아내를 잃어야 했고, 보금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하벙커 계단 밖을 나서지 않았던 그의 분노는 계단을 거슬러올라가 '기우'의 머리통을 박살내기에 충분했고, '기주'의 심장에 칼을 꽂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분노는 결과적으로 '기택'에게 전염되었고, 그의 손에 '박 사장'까지 목숨을 잃으며, 서로 다른 세 일가족들의 붕괴를 초래한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봉준호 감독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 개인의 생각은 아닐지언정, 현대 사회의 고착화된 계층 구조가 보여주는 현실은 오히려 더 냉소적으로 영화를 두둔할지도 모른다. 반지하보다도 더 못 한 곳에서 살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사람들, 더 큰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와 무관하게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지만,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계층의 벽을 허물기에는 개인은 너무도 나약하다. 지금 이런 말을 써재끼고 있는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