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건조한 눈동자로 서로를 지긋이 응시했다. 언젠가는 듣게 될 말이었다. 아니, 오늘 들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분명한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그들의 눈빛 속에는 후회, 연민 혹은 분노일지도 모르는,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감정들이 부산스럽게 혼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애써 감추며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곱씹었다. 언제부터 이별을 결심했는지, 언제부터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지리멸렬한 시간 죽이기에 불과했던 것인지, 근원적으로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그런 한탄들을 한없이 늘어놓고 싶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내 아메리카노가 담긴 커피잔 주위에 맺힌 물방울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는 그였다. 어느 순간부턴가 서로에 대한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해진 것 같았다. 데이트 날에도 카페 의자에 드러누워 각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조금 더 편했고,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져서 듣는 너의 지난날들보다 인스타그램 속 친구의 시답잖은 댓글이 더 재밌었다.
피시방에서 하릴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며 게임을 하는 것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선 친구들의 인스타스토리를 하나씩 눌러가며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더 재밌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할 말 없으면 일어나자."
"..."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서로가 서로에게 품었던 크고 작은 서운함과 짜증을 늘어놓는다고, 서로가 지난 행동들에 대해 참회하고, 반성한다 해서 이 순간의 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 만나서는 그러지 말라고 무성의한 충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만, 이렇게 자리에서 일어나기에는, 아직 조금은 이른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어깻죽지를 스쳤다. 채 몇 모금도 마시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픽업대에 가져다 놓는 순간이면, 아마 모든 것이 끝나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일어나자."
"잘 지내고, 좋은 사람 만나. 먼저 일어날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의자 뒤에 걸려있는 가방과 옷가지를 주섬주섬 들고 일어섰다. 한시라도 빨리 이 숨 막히는 공기로 자욱한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가방, 너가 선물해 준 건데. 가져갈래?"
500일 기념 선물로 줬던 가방이었다. 저 가방 하나 사겠다고 없는 형편에 손 벌벌 떨면서 6개월 할부를 긁었더랬지.
"받아봐야 쓸 곳도 없는데."
"나도 가져가기 싫어. 괜히 너 흔적 남기는 거 같아서."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냐."
하지만 헤어지는 마당에 마음 한편을 쿡 찌르는 날 선 말을 구태여 교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 그럼 이것도 가져가."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생일선물로 받은 시계를 풀고, 200일 기념으로 맞췄던 반지를 빼내고, 500일이 되던 크리스마스에 인사동에서 함께 샀던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마치 그들의 시간을 나열하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많기도 하네." 그는 이내 입술 끝을 앙다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차하고, 찌질해져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도 보기 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라는 불편한 정당화의 과정이 뒤를 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었던 그 모든 행동들은 결국에는 자신의 지출 내역에 비례해서 상호 간의 사랑으로 치환됐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순간에 정산할 뿐이었다.
"잘 지내. 간다." 그는 나지막이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내 그는 서둘러 스타벅스의 출입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힘없이 들어 그의 친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몇 안 되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혼자라도 소주 한 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