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만 해도 너나 다른 애들이나 연애하느라 바빴잖아. 학교도 다니고 있었고. 되게 부럽더라. 나는 하루종일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하루종일 누워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퇴근해서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너네한테 전화하기도 좀 그렇더라고."
"그렇긴 했지. 수업이 많았으니까."
"몇 번 전화했는데, 바쁘다, 여자친구 만난다, 그러니까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바쁜 애들 발목 잡고 늘어지는 것 같아서..."
"괜히 좀 미안해지네."
"그리고 그때 너네들이 입버릇처럼 만날 하는 얘기가 있었잖아. '형은 언제 연애함? 연애할 생각은 있음?' 이런 식으로."
"근데 그때 형이 뭐 아무것도 안 하긴 했잖아. 정확히는 바빠서 못 했던 거긴 하지만."
"그치. 근데 그땐 뭐랄까, 제대로 연애할 자신이 없었지. 나조차도 먹고살기 힘든데 여자친구까지 행복하게 할 자신이 어디 있겠냐. 너도 알잖아. 나 16년, 17년에 뻥튀기에 펩시만 먹으면서 일주일 버틴 거."
"진짜 어떻게 버텼냐. 리스펙 한다. 진짜."
"아무튼 그래서, 일 시작하고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다 보니까, 슬슬 그런 쪽으로 시선이 옮아가는 거지. 나 혼자 어디 여행 가거나, 재밌는 거라도 보면 같이 노가리 까면서 놀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랬던 거지."
그는 다시 초록 병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밑바닥에 조금 남은 술이 찰랑거렸다. 사장님, 후레쉬 하나요.
"아무튼 그렇다 보니까 나도 궁금해지는 거야. 도대체 연애라는 게 뭘까. 뭐길래 나 빼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데이트도 하고, 인스타에서 그토록 꽁냥대는 걸까 싶은 순수한 궁금증? 그런 게 있었지."
"그래서, 지금은 좀 해결됐어? 왜 연애라는 걸 하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 이렇게 대가리 싸매고 힘들 거 뻔히 알면서 왜 하는지."
그의 친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헤어져보니까 어때?"
"그냥 좀... 허무하달까. 영화 한 편을 봐도 여운이라는 게 남는 법이고, 재밌었으면 한 번 더 볼 수도 있잖아. 하다못해 남들이 남겨놓은 리뷰라도 찾아보면서 내용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실없이 감상에 젖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거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상태에서 다시 보면 또 새롭잖아.
근데 이건 헤어지는 순간, 그냥 끝인 거야. 돌아갈 수도, 새로 시작할 수도 없는 거지. 단절되어 고립된 상태에서 머무르길 강요받고,그간의 모든 관계가 종말을 맞이하면서물거품처럼사라져 버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서로가 아무 연관성 없는 인간과 인간으로 분리되어 언제 알고 지냈냐는 듯이 각자 살 길 찾아 떠나는 거잖아.
그러다 보니뭔가 이런 상황과 지나가버린 일에 조건반사적으로 감정을 쏟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고, 무가치한 일로 변질된다는 게 참... 당연할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게 힘들기는 하다."
조금 술기운이 올라온 그는 연신 소주잔을 들이켰다. 그가 안주 삼던 짬뽕탕은 어느새 밑바닥을 보였고, 생기를 잃은 야채들만이 냄비 벽면에 흉하게 달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