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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도피 28. 컨딩에서 서핑하기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쭈뼛거리면서 아X이서프 앞을 기웃거렸다. 낯선 것을 도전한다는 긴장감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포기할 것인가. 용감하게 도전할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하는 쪽으로 마음의 저울이 기울기 직전. 차량 한 대가 서핑숍 앞에 멈추더니 딱 봐도 이마에 '나는 서퍼'라고 새겨놓은 듯한 남성이 차량에서 내렸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색에 다부져 보이는 체격이 10미터 밖에서 봐도 분명 전문적으로 서핑을 하는 사람이었고, 왠지 이 가게와 관련이 있는 사람 같았다.


낯가림이 발동하여, 조심스럽게 “혹시 서핑 수업 예약도 되나요?”라고 말을 걸었다.

남자는 당연히 가능하다면서 흔쾌히 예약을 도와주셨다.


전문가 아저씨께서 오늘 파도가 괜찮으니, 기왕 서핑을 배울 거면 오늘 당장 하라고 하셨다. 헐! 나는 일단 내일 하는 걸로 예약만 잡을 생각이었는데,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전문가 아저씨께서 쐐기를 박으셨다.


"지금 입문 수업 신청한 사람이 없어서, 지금 하면 1:1 레슨도 가능해요."


기왕 배울 거면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터라, 그럼 일단 숙소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컨딩대가로, 그리고 또다시 난완으로 향했다. 정말 비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아, 서핑숍에 갈 때 처음부터 필요한 물건들을 잘 챙겨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다시 찾아간 난완의 아X이 서프.

나의 낯가림이 발동해 버렸다. 서핑숍 직원들과 수강생분들(한국분도 계셨다.)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쭈뼛거리며 서핑을 배울 준비를 했다. 검은색 쫄쫄이, 아니, 웻슈트를 입자 더욱 어색해졌다.


'이게 맞나? 내가 잘한 선택인가?'


분명 꼭 배워보고 싶은 서핑이었는데,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물에 대한 공포심이 계속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친구와 양양 여행을 갔을 때를 떠올렸다. 서핑을 배운 적 있는 친구는 재미있게 파도를 즐겼는데, 나는 물 밖에서 그런 친구를 부럽게 바라봤었다.(그때도 물이 무서워서 서핑을 배우지 않았다.)


그때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했는가. 왜 난 용기를 내지 못하는가.

그렇게 나 자신을 자책했었다. 어쩌면 그런 용기 없는 태도가 전 직장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던 건 아닐까? 나의 이런 답답한 행동들, 겁쟁이 같은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는 안 좋게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웻슈트도 입었겠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첫 번째 서핑 선생님을 만났다.

마음만큼은 전문 서퍼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서핑은 해봤어요?"

"아뇨.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리고 전 수영도 못해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오히려 더 잘 됐어요. 1:1 레슨이니까 더 많이 연습할 수 있겠네요."


24살의 젊은 선생님은 열정 가득한 모습으로 꼼꼼하게 서핑의 기본기를 가르쳐주셨다.


"오늘은 파도가 올 때 밀어줄 테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넵!"


분명히 유튜X에서 서핑하는 영상을 봤을 때는 참 쉬워 보였는데, 실제 배워보니 전혀 아니었다. 특히 테이크 오프를 할 때마다 재빨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호랑이 선생님은 가차 없으셨다. 조금이라도 더 연습을 해야지 된다면서 바닷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보드 위에 올라가라 하신 후, 파도가 오자마자 냅다 밀어버리셨다.


"으아!!!"

내 외마디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요!"

제대로 테이크 오프를 하기도 전에 파도에 빠져버렸다. 컨딩의 바닷물이나 한국의 바닷물이나 똑같이 짰다.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일어나면, 선생님께서 또 "빨리 와요!"라고 소리를 치셨다. 그럼 또 보드를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수십 번의 연습을 반복했다. 막판에는 선생님께서 "일어나"의 '일'만 말해도 바로 테이크 오프를 할 수 있었다.


IMG_0838.JPG?type=w773 인생 첫 서핑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는데,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하자 서핑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출렁거리는 파도에 거스르지 않는 것, 몸의 무게 중심을 자연스럽게 파도에 싣는 것, 고작 한 시간 남짓 배운 걸로 서핑의 '시옷'자도 모르겠지만, 서핑 레슨이 끝날 때쯤 되니까 조금씩 동작에 자신감이 붙었다. 선생님께서 "일어나요!"라고 외치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는 정도가 되자, 선생님이 "처음치고는 진짜 잘한다."라며 립서비스를 해주셨다.


"와!! 진짜 재미있어요!"


선생님과 사진을 찍어주던 직원분에게 몇 번이나 쌍따봉을 날렸다. 돈과 시간 여유만 있다면 컨딩에서 며칠 더 체류하며 서핑을 배우고 싶었다. 겨우 1시간 조금 지났을 뿐인데 조금 전 막연한 두려움에 서핑 수업을 포기하려고 했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처음 배운 서핑은 낯설지만 재미있고, 이걸 배우고 있는 나 스스로가 무척이나 대견했다. 물에 대한 공포심,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속에 무엇인가에 도전할 수 있는 열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아, 나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낮게 평가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남들은 다 잘하는데, 어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해 왔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서 분석해 댔다. 그런 행위는 나의 자존감을 더 낮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하고자 마음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

바닥을 치고, 지구 속 중핵까지 파고들었던 나의 자존감이 이 한 시간짜리 서핑 수업을 통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 서핑과 컨딩의 바다가 나에게 준 마법이었다.






해 질 녘이 되자,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 시간 있으니까 10번만 더 타라고 권하셨다. 하지만 웻슈트를 입었어도 찬바람이 불자 맑은 콧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아유-, 저 이제 그만할래요.”라고 말하며 바다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다.


"앞으로도 여행 잘하세요."

"네,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일도 시간 되면 또 오세요."


선생님과 악수를 나누고, 직원들과도 이별 인사를 나눈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서핑을 배워보겠다는 버킷리스트는 달성했지만, 조금 아쉬웠다. 다음에 또 컨딩에 돌아온다면 그때는 이곳에서 더 많이 서핑을 배워야겠다. 또 이렇게 컨딩에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숙소 근처로 돌아오니 컨딩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낮에는 그렇게 유령도시 같더니, 밤이 되자 다들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온 거리가 떠들썩하게 변하는 것이 신기했다.


KakaoTalk_20250210_095543403.jpg 컨딩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어간다.
IMG_0794.JPG?type=w773 컨딩대가의 모습


컨딩 바닷물 좀 마셨다고 따끈한 국물이 당겼다. 문을 열은 가게들을 살펴보다가 야시장 한 구석에 있는 국숫집을 찾아갔다. 컨딩에 머무는 동안 나의 저녁 식사를 책임져주었던 이 식당은 저녁 6시에 오픈하는 가게였는데 저렴하고 맛도 좋아서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 사람들도 정말 많이 오는 곳이었다.


IMG_0797.JPG?type=w773 컨딩 국숫집
IMG_0795.JPG?type=w773 우육탕면은 고기가 없었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따뜻한 우육탕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늘 먹던 스타일대로 소스를 넣지 않은 채로 반절쯤 먹다가, 고추소스를 조금 넣어서 먹었다. 고추의 칼칼한 맛이 입안에 맴도니 땀이 쭉-나면서 정말 맛있었다.


배불리 밥을 먹고, 컨딩대가를 거닐었다. 그리고는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술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취해버리지만,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오늘을 축하하고 싶었다.


여행의 절반 지점인 컨딩에 온 것.

내가 늘 배워보고 싶었던 서핑을 배운 것.

어제보다 오늘 더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을 모두 축하하고 싶었다.



맥주만 마시기 아쉬워서 다시 야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매콤하게 버무려진 무뼈닭발을 한 접시 구매했다.


IMG_0846.JPG?type=w773 내 사랑 무뼈닭발, 그리고 맥주


개운하게 샤워하고 나와서 좋아하는 유튜X방송을 틀어놓고, 무뼈닭발과 맥주를 먹었다. 정말 끝내주는 조합이었다. 맥주 한 모금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술 때문인지 계속 실실 웃음이 나왔다.

컨딩에서의 첫날밤은 이렇게 웃음과 함께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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