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어제의 여파인지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움직여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침대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한참 동안 미적거리며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다가,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이불 밖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젯밤 야시장에서 산 과일 3종 세트를 아침밥 대신 먹었다.
과일가게 아저씨께서 대만 사람들은 구아바에 양념을 찍어 먹는다며 소금 같은 것을 주셨는데, 다시 보니 소금이 아니라 매실가루(酸梅粉)였다. 구아바는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지인 추천이니 매실가루에 구아바를 콕콕! 찍어먹었다. 찍어먹나, 안 찍어먹나 똑같이 맛있었다.
넷X릭스와 함께 배부르게 과일을 먹고, 컨딩대가에 있는 24시 무인 세탁방에 가서 그동안 미뤄왔던 빨래를 했다. 지난번 타이난 Liho hostel에서 단돈 20대만달러를 주고 샀던 세제는 오늘도 아주 유용하게 잘 사용했다. 섬유유연제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세탁세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서 더 이상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세탁방에서 멍을 때리면서 음악을 듣고, 핸드폰 게임을 했다.
대충 잡히는 옷을 아무거나 툭, 걸쳐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내 모습이 마치 컨딩 현지인 같아서 내심 뿌듯했다.
건조까지 모두 마친 옷들을 툭툭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어제 갔던 스타X스에 가기로 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니까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서 글을 쓰기로 했다.
컨딩에 하나 있는 스벅으로 걸어가는 길.
도로가에 나타난 원숭이 한 마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릴 적 동물원에서나 봤던 원숭이를 대만에서, 특히 대만 남부에 와서는 아주 질릴 정도로 원숭이를 만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 반, 무서운 마음이 반이라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원숭이가 무사히 대로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약 20분 정도 느릿하게 걸어서 스타X스에 도착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치즈케이크를 하나 시켜놓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직원들과 가볍게 수다를 떨었다.
다른 대도시의 스타X스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겠지만, 한가로운 이곳 컨딩에서는 직원들과의 수다가 가능했다.
2층에 올라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는 찰나, 전 직장 직원에게 메시지가 왔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뒷골이 얼얼했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의 내용은 업무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솔직히 어이없고 황당했다.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왜 퇴사한 사람에게 묻지? 그 정도도 본인이 해결을 못하나?
퇴사한 지 2주나 지났는데…
아! 2주! 맞다! 퇴직금 지급 기한이다.
나는 서둘러 은행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전 직장에서 들어온 돈은 없었다.
메시지를 보냈던 직원에게 내 퇴직금에 대해 묻자, 직원은 행정팀 직원이 연락을 안 했냐고 되물었다.
"아, 이 멍청이가..."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행정팀에 확인해 보니 회계 담당 직원이 내 퇴직금을 다른 계좌에 잘못 입금해서 현재 수습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마도 퇴직금 지급을 늦게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과정에서 사과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참 우스운 일은 행정팀장이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설명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음에도 그 직원은 내가 대만에 있다는 이유로 해당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면 이럴까? 얼굴에 열이 오르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분명 퇴사하기 전, 퇴직금은 퇴사 후 14일 이내에 지급되어야 한다고 그 직원에게 말을 하고 나왔었다. 14일 안에 입금되지 않으면 고용노동부가 되었든, 도청이 되었든, 어디든지 모조리 신고하겠다고 경고를 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았나 보다.
내 후임자에게 화를 내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곧장 최고관리자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당장 퇴직금을 입금하지 않으면 그동안 내가 당했던 일과 퇴직금 미지급까지 모조리 신고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황당하게도 최고관리자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라며 그 직원에게 당장 입금하라고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 직장에서 5년을 근무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그곳에서 근무하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많이 경험했다. 그래도 단순한 내 성격의 문제인지, 무엇이든 '좋은 게 좋은 거니'하고 버텨왔다. 마냥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혹 가다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칭찬도 들으니... 마치 그 일이 내 천직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마지막 1년은 정말 지옥 같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다.
내 직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막판에는 나에게 주어진 업무에서 마저 배제되어 그냥 윗선이 ‘시키면 일을 처리하는’ 로봇같이 살아왔다.
심지어 관리자는 내가 인사를 해도 무시해서, 반년 동안 하루 3 문장 이상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나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고,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덩달아 나를 무시했던 다른 직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하지만 퇴사가 결정된 후, 최대한 좋은 모습으로 이별하고 싶었다.
5년간 내가 당해왔던 갑질을 폭로하고, 모든 것을 다 뒤엎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다가도 꾹 참고 그저 조용히 나오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회사에서 나에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힐 수 있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울었다. 고작 내가 이따위 대우를 받자고 그 회사에서 5년간 헌신했나?
내가 왜 회계직원 한 명 때문에 행복한 여행을 망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직원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네가 뭔데 감히 내 기분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당장 한국으로 쫓아가서 직원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고,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지금의 이 감정을 삭이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 여행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가.
이번 여행을 위해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중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체력 증진을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해왔다.
여행자금을 위해 절약하며 저금 액수도 늘려갔다.
이 여행을 위해 그동안 내가 쏟아온 정성과 노력을 고작 그딴 인간 하나 때문에 망칠 순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 있는 치즈 케이크를 그 직원이라고 생각하며 마구 부셔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꼭꼭 씹어서 삼켜버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있는 얼음까지 으득으득 씹으니 꽉 막혔던 속이 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의 소중한 여행.
이 여행을 위해 그동안 노력해 온 시간들,
이 여행을 기대하면 설레했던 내 마음,
대만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행복감을 다시 떠올렸다.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고, 머릿속을 갉아먹던 과거의 잔상들이 조금씩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소맷자락에 눈물을 슥-닦아버렸다. 그리고 남은 커피를 싹 마시고 카페 밖을 나섰다.
감정을 추스를 겸, 산책 삼아 산으로 향했다.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동네 뒷산을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한참 산을 오르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또 야생 원숭이가 나뭇가지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원숭이 한 마리와 눈이 딱 마주치자, 너무 무서워서 등산이 대수냐?! 하며 후다닥, 컨딩대가로 돌아왔다.
헐레벌떡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컨딩에 도착했던 날 처음 갔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대만 물가치고는 비싼 400대만달러짜리의 스파게티와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는 콜라도 하나 주문했다. 오늘은 마음도 속상했고, 울기도 했으니 이 정도는 먹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를 해보았다.
내일이면 컨딩을 떠나 타이동으로 간다. 이제 내 여정도 절반이나 지나온 셈이다.
분명 앞으로도 지난 5년의 일들은 종종 나를 괴롭고, 힘들게 만들 것이다. 그럼 나는 또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화를 내겠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을 비난하기도 할 것이고, 또 스스로의 자존감을 갉아먹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이 감정을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주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나의 앞으로의 여정만을 바라보자.
앞으로 남은 나의 여행길은 더욱 아름답고, 행복하며, 찬란할 것이니까.
과거에 얽매여 눈앞에 반짝임 들을 놓치지 말자.
나의 감정과 시간을 과거의 일에 허비하지 말자.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아주 미숙하지만
이제야 조금씩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알 것 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