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처음 컨딩에 도착했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버스도, 택시도 거의 보이지 않았던 컨딩대가와 낮 동안에는 문이 닫혀있었던 대부분의 식당들을 바라보며
시골이다. 교통이 불편하다. 스쿠터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간다며 하루 종일 불편함을 호소하며 징징거렸는데, 막상 이곳을 떠나는 날이 되니 컨딩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일출을 보겠다는 계획은 오늘도 어김없이 실패했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느지막이 일어났다.
아, 이 쾌적한 숙소에서도 이제 마지막이다.
어젯밤에는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웠다. 이 따가운 컨딩의 햇빛과도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체크아웃 시간까지 숙소 앞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발 끝에 밀려드는 새하얀 포말도
하늘보다 더 푸르고, 반짝였던 바다의 윤슬도 이제는 안녕이었다.
"아, 하루만 더 있고 싶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만큼 컨딩은 매력적이고,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었다.
바쁘게 살아갔던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온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숙소 앞을 지나다, 컨딩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마주쳤던 떠돌이 개들을 다시 만났다.
그동안은 이 개들을 본체만체하며 지나갔는데 오늘은 괜히 개들을 따라 길을 걸었다.
이 똑똑한 아이들은 나에게 "이쪽 바다도 예뻐요."라는 듯, 바다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로 나를 안내했다. 심지어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대만은 중부에서 남부로 내려갈수록 커다란 떠돌이 개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아리산을 여행할 때, 가이드 아저씨께서 산짐승들에게서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큰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그럼 컨딩에서는 왜 이렇게 큰 개를 키우기 시작한 걸까? 원숭이 때문일까?
사실 나는 커다란 개를 굉장히 무서워하는 편인데, 컨딩의 떠돌이 개들은 생각보다 굉장히 얌전했다.
마치 나른한 고양이들처럼 햇빛 좋은 곳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유유자적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이 컨딩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개들에게도 영향을 준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큰 개들이 별로 무섭지 않아 졌다.
(물론 굉장히 무서운 개들도 있으니까 절대 함부로 만지거나, 일정 거리 이상으로 다가가지는 말자.)
바닷가 산책을 마친 후, 떠돌이 개들과도 이별을 했다.
떠돌이 개들과 이별한 후, 나는 아침 식사를 위해 컨딩대가로 돌아와 아침식사가게로 들어갔다.
오늘은 컨딩에서 컨딩 익스프레스 버스를 타고 팡랴오까지 이동한 후, 팡랴오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타이동까지 이동하는 자칭 ‘이동의 날’이다. 이런 날은 점심 식사를 하기 아주 애매하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든든하게 잘 먹어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평소의 편의점 삼각김밥, 과일, 빵 등이 아닌, 제대로 된 '타이완식 플래터'를 먹기로 했다. 타이완식이라고 하길래 어떤 음식 인가 하고 조금 기대했는데, 딴삥과 계란프라이, 감자튀김, 참치샐러드가 한 접시 가득 나왔다. 여기에 시원하고 달콤한 홍차 한 잔이면 게임 끝!
사실 딴삥은 대만의 대표적인 아침식사 메뉴인데, 나는 이날 딴삥을 처음 먹어보았다. 딴빙은 얇게 부친 밀가루 전병 같은 느낌이었는데, 굉장히 담백하고 속에 부담이 없어서 무척 맛있었다.
든든하게 식사까지 마무리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짐 정리를 하고,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컨딩 파출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컨딩 익스프레스 버스를 탑승했다. 버스 안에는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컨딩에서 타이동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팡랴오를 거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컨딩에서 팡랴오까지는 컨딩 익스프레스 버스를 타고, 팡랴오에서 타이동까지는 기차를 타는 방법이다.
이 이동 루트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이동시간이 가장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약 1시간을 달려, 나의 첫 번째 목적지인 팡랴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내 무거운 캐리어를 꺼낼 수 있었다.
그동안 컨딩에서 내 발이 되어준 고마운 컨딩 익스프레스 버스가 떠나고, 나는 팡랴오역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타이중을 시작으로 타이난, 가오슝, 컨딩까지...
그래도 그동안은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있고,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도 종종 읽을 수 있었는데, 오늘부터는 정말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동안 애용하고 있던 네이버 카페에 팡랴오에 대한 관련 정보를 검색했지만 마음에 드는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일단은 예매했던 기차표를 발권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 앞에 망고와 물고기 모양의 조각상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핑동의 친구가 말해준 바에 따르면, 팡랴오는 과일과 생선으로 무척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특히 이곳은 망고와 롄우가 대표적인 특산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역 안에 있는 의자들이 모두 왁스애플 모양이었다.
아침에 미리 예매해 놨던 기차표를 수령하고, 왁스애플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기차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구글맵을 뒤적거리다 팡랴오역 근처에 블루 스테이션(blue station)이라고 하는 카페 겸 기념품 숍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역 안에 캐리어 보관 서비스가 있어서 캐리어(=짐 덩어리)를 맡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팡랴오역을 빠져나왔다.
藍皮意象館 BREEZY BLUE STATION
No. 15號, Chuyun Rd, Fangliao Township, Pingtung County, 대만 940
이 카페는 커피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핑동의 특산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어서 딱히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잠시 들어가서 특산품을 구경하고 핑동에 대한 전시물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덧 팡랴오역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서둘러 역으로 돌아간 나는 타이동으로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팡랴오역을 출발한 기차는 타이완 내륙을 가로질러 동부로 향했다.
대만 동부에 대한 적은 정보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마치 오지여행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차에서 타이동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하고, 어디를 어떻게 봐야지 효과적으로 더 많이 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차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태평양이었다.
드디어 타이동역에 도착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 란위섬 소수민족의 전통 배가 놓여 있었다.
타이동, 화롄등 대만 동부에는 우리에게도 꽤 많이 알려진 아미족부터 다양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기차역 앞부터 소수민족의 흔적을 보게 되어 너무 신기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남은 여행이 너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