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타이동역에 도착한 후,
역에서 도보 12분 거리인 숙소로 향했다.
이번에 내가 머물 숙소는 민박(民宿)이었다.
그동안은 여행을 하며 호텔이나 유스호스텔 등을 주로 이용해 왔기 때문에 대만의 민박은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나라 민박집이나 다 똑같았다. 대신 민박을 통해 대만의 일반 가정집의 구조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점과 대만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는 점이 특별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민박 사장님이신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내가 머무는 방은 3인실이었는데, 무려 3층에 있었다. 일반 가정집이니까 엘리베이터가 있을 리 없었다. 그동안 다져진 체력을 다 긁어모아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어 옮겼다. 대만의 전형적인 가정집 구조인 이 민박집은 평수는 작지만, 3층 높이의 가옥이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이 정말 아찔했다.
간신히 방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숙소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 하니 번화가(버스터미널 쪽)로 나갈 계획이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대만 여행을 하며 나의 소중한 발이 되어준 고마운 버스.
그런데 타이동은 이 버스가 참 이상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처럼 타이동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이 버스 노선을 한 번에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타이동은 버스가 지하철처럼 크게 3개의 노선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 타이동역 - 타이동 버스 터미널
2. 타이동역 - 타이동 국제공항
3. 타이동역 - 푸강항구
다른 노선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관광을 위해 타야 하는 버스는 이렇게 3가지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정말 최악인 점은 이 놈의 버스들은 배차 간격이 정말 커서, 한번 놓치면 기본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타이동의 버스는 참 이용하기 어려운 교통수단이었다. 구글맵에 고개를 파묻고 몇 번을 살펴본 후에 간신히 버스를 탔다.
나 역시 철도예술촌을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돌연 내 목적지를 물으셨다.
“어디까지 가세요?”
“저 철도 예술촌에 가려고요.”
“이 버스, 그쪽에 안 가니까 내리세요.”
“네???”
구글맵에서는 분명 이 버스라고 했는데? 구글맵과 아저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저씨께서는 단호한 얼굴로 뭐라고 설명하셨으나, 슬프게도 대만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쫓겨나듯 산림공원 입구에서 강제 하차를 당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버스는 푸강항구를 가는 버스였다. 잘못했으면 항구까지 갈 뻔했다.
목적지를 물어봐주신 버스 기사님께 감사를...)
결국 구글맵에 고개를 처박고 철도 예술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타이동현정부 건물을 지나고,
타이동 중앙시장도 지나서 도착한 철도 예술촌.
그동안 여행해 왔던 다른 도시들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작은 시골 읍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만큼 시장에서 흥정하는 사람들, 그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모습들이 무척이나 정겨웠다.
철도예술촌은 아쉽게도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저 옛 철도길과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옛 기차들, 그리고 몇몇의 조각상들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못한 모습에 조금은 허무했지만,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서 산책하는 타이동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그동안 내가 너무 조급하게 여행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분 단위로 계획을 짜고, 계획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짜증을 부렸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해 본다.
주변의 풍경도 보고, 다리가 아플 때는 무리하지 않고 잠시 쉬어갈 줄 아는 여유도 중요한데…
구글맵을 보겠다고 핸드폰에 머리를 박고 무작정 걷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하루를 48시간처럼 쓰겠다며 미친 듯이 걷고, 보고, 사진을 찍어댔는데…그런 것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나에게 필요한 여행은 어떤 것일까?
잠시 벤치에 앉아 타이동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행의 절반을 지나온 현재, 나는 앞으로 어떤 여행을 해야 할까?
나는 타이동에 오기 전, 타이동 여행이 무척 두려웠다.
타이베이나 가오슝 등과 같이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고, 여행 정보도 많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타이동에 대한 정보가 적다는 것이 가장 큰 심리적 압박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서 사실은 타이동은 환도여행에서 빼버리고 가오슝이나 타이베이에서 더 오래 머무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타이동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타이동의 사람들은 순박하고 여유로웠다.
왜 누군가가 짜놓은 계획대로, 누군가가 이미 다녀본 길로만 여행을 다녀야 하는가? 왜 블로그와 sns에 나온 정보에만 의존해서 움직여야 하는가? 문득 지금까지 다녀본 내 여행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잘 모르는 지역이니만큼, 그 지역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현지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하는, 그런 여행을 하자.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타인의 경험이 아니라,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내가 직접 체험해 보는 여행을 하자.
그렇게 결심을 했다.
모를수록 일단 부딪쳐봐야지!
두렵다고 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마음속에 계속 쌓여있던 짐 덩어리 하나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보가 없어서 여행이 두렵다면, 정보를 찾으면 그만이다.
철도 예술촌 바로 앞에 있는 여행자 서비스 센터에 방문해서 타이동 하오씽에 대한 정보와 뤼다오 가는 방법에 대해 문의했다.
직원분은 굉장히 친절했다. 한국인 관광객은 오랜만에 본다면서 한국어로 된 타이동 안내서를 한 부 건네주셨다.
서비스 센터 직원이 건네준 타이동 안내서를 가방에 잘 넣고, 여행자 서비스 센터 내에 타이동의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그곳도 구경하기로 했다.(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특이하고 예쁜 엽서부터 직접 만든 뜨개질 소품이 한가득 있었다. 타이동의 대표적인 특산품이 석가이니 만큼 석가 모양의 열쇠고리가 정말 귀여웠다. 열쇠고리가 너무 갖고 싶어서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가 '이게 진짜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여행자 서비스 센터 직원분께서 주신 타이동 안내서를 살펴보니, 타이동은 맛있는 먹거리가 참 많은 곳이었다. 특히 타이동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석가라고 하지만, 석가뿐만 아니라 쌀도 굉장히 유명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선찹쌀떡을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중 하나로 추천하고 있었다.
생선찹쌀떡?! 뭔가 이름만 들었을 때는 잘 상상이 안 가는 맛이었다. 대체 생선으로 무슨 찹쌀떡을 만든다는 것일까? 이름은 참 이상했지만, 용감하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구글맵을 검색해서 타이동 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유명 찹쌀떡가게를 찾아냈다.
다양한 맛의 찹쌀떡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탄수화물순이가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 가격은 좀 비싼 편이었지만 생선찹쌀떡과 땅콩, 검은깨찹쌀떡까지 골고루 사고, 찹쌀떡을 바삭하게 구운 것도 2개나 구입했다.
몇 개는 오늘 밤에 야식으로 먹고, 나머지는 내일 간식으로 먹어야겠다.
그리고 타이동 = 쌀 = 미타이무!
그렇다. 타이동은 미타이무다.(단호함)
타이동에서 미타이무를 먹지 않은 자, 타이동을 논하지 말라.
베트남의 쌀국수처럼 타이동은 쌀을 이용한 면요리인 미타이무가 대표적인 음식이다. 찹쌀떡을 구입한 나는 바로 구글맵에 미타이무를 검색했다. 타이동의 대표음식인 만큼 수많은 미타이무 가게들이 있었다.
나는 그중 찹쌀떡가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가게를 하나 찾아서,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대만을 여행하면서 대만 특유의 사투리 때문에 간혹 말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었는데, 타이동에 와서 사투리 때문에 말이 안 통한 적이 상당히 많았고, 그중에서도 이 가게가 사투리 1등이었다. 특히 사장 할아버지는 사투리가 굉장히 심하셨고, 결국 다른 직원분이 주문도 받고, 계산도 도와주셨다.
오동통한 쌀국수의 쫄깃한 식감과 쿰쿰한 가쓰오부시의 향이 입맛을 자극했다.
반절쯤 먹다가, 매콤한 고추 양념을 넣어서 한 입 먹으니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아, 정말 맛있다. 짭짤하면서 구수한 맛. 한국에서도 미타이무를 팔아줬으면 좋겠다.
▶️ 탱탱쫄깃면을 좋아하시나요? -> 네.
▶️ 가쓰오부시를 좋아하시나요? -> 네.
▶️ 자극적이지 않지만 살짝 짭조름한 맛 좋아하시나요? -> 네.
그럼 당신을 '미타이무쟁이'로 임명합니다.
탱탱하고 쫄깃한 면도 너무 좋고, 한가득 들어간 가쓰오부시 특유의 향과 고소, 짭짤한 맛도 너무 좋았다.
숙주나 부추도 아삭하니 맛있었다.
고소한 미타이무를 배부르게 먹고, 다시 타이동 관광 야시장 쪽으로 가면서 타이동의 특산품 중 하나인 고구마칩도 한 봉지 구매했다.
오래된 노포라는 인증마크가 있는 곳이었다.
넘치는 짐 때문에 여기서 고구마칩을 한 봉지만 사 왔는데, 한국에 와서 가장 후회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조금 걸어서 타이동 야시장에 도착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타이중 펑지아 야시장, 가오슝 류허 야시장, 컨딩의 컨딩 야시장을 가봤는데, 개인적으로 타이동 야시장이 가장 야시장다운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가오슝의 류허 야시장과 분위기는 매우 비슷하지만 류허 야시장은 관광객들이 굉장히 많았고, 타이동은 현지인들이 많은 편.)
저녁 식사로 미타이무를 먹었기 때문에 야시장에서는 따로 식사를 하진 않고, 간단하게 군것질만 하기로 했다. 타이동 야시장을 산책하다 보니, 시장 끝자락에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서있었다. 고개를 길게 빼고 쳐다보니, 처룬빙(車輪餅)이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섰다. 앞선 사람들이 무엇을 주문하지는 잘 지켜보고 있다가, 나도 그 사람들을 따라서 연유맛 처룬삥을 하나 주문했다. 처분삥은 쉽게 생각하면 우리네 풀빵과 비슷한 과자였다. 묽은 반죽을 틀에 넣고 굽다가 그 속에 소를 넣어서 다시 구워주는 것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폴폴 나는, 갓 구운 처분삥은 車輪餅은 정말 너무 맛있었다.
그 자리에서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타이동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로 가는 길. 아까는 별로 볼 것도 없었던 철도 예술촌에 조명이 켜지며 프리마켓도 열리고,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버스킹을 듣고 있었다.
이 여유로움, 이 분위기 너무 좋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이 나도 잘 알고 있는 “月亮代表我的心”을 불러서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선선한 바닷바람에 조명이 흔들거리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타이동 사람들 속에 녹아내렸다.
이 사람들처럼 나도 여유롭게, 평온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큰 감흥이 없었던 톈화 뮤직 빌리지도 밤이 되니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에도 타이동은 마냥 낯설고,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타이동의 거리를 거닐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타이동에 대한 나의 인상은 180도로 변화하였다.
맛있는 미타이무에 한번, 아름다운 밤풍경에 또 한 번.
그렇게 나는 타이동을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