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자전거를 대여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자전거 렌털숍 사장은 이번 대만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 중 탑 3위에 들어갈 만큼,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단 내가 자전거를 빌릴 때부터 그는 나에게 사적인 질문도 많이 하고, 예전에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며 굉장히 친절하게 굴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일반적인 대만 사람들의 친절함이라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종종 마주쳤던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친절이라고 느꼈다.
그는 내가 자전거를 반납하러 갔을 때 역시 굉장히 친절했다.
내가 역까지 걸어가겠다고 하니, 화들짝 놀라며 “이 날씨에 걸어간다고??”라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직원들에게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라고 이야기하고는 나에게 직접 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굳이? 그의 과도한 친절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솔직히 날씨가 너무 더웠다.
아무리 그늘 쪽으로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를 날씨였다.
고민하다가 결국 “고마워요!”라며 넙죽 차에 올라 탔다.
(* 사실 낯선 사람 차에 타는 건 한국이나 외국이나 매우 위험한 짓이다. 절대 하면 안 됨)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츠샹의 시골길을 달렸다.
사장은 “너 천당루는 가봤어? 왜 보랑대도만 다녀왔어?”라고 물어봤다.
아, 그런 곳도 있었나요?
그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고 하자, 본인이 지금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당황했지만, 기차 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그에게 보랑대도를 구경하며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보랑대도 옆에 있는 논은 누구 거야?”
“응? 내 건데?”
나는 남자가 허풍을 치는 줄 알고 엄청 웃었다.
“그럼 너 부자야?”
“응, 내가 여기 청년 이장이야.”
“하하하! 진짜?”
믿거나 말거나지만, 내가 조금 관심을 보이자 그는 신이 나서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운영한다는 민박집도 보여주고, 이 일대를 이렇게 관광지화 시킨 게 자신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나는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했으나,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믿어본다.)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과 틱톡 계정을 보여주며, 본인이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어서 종종 왕홍들과 사진 작업을 한다고도 했다.
그의 말에 조금 의심은 들었지만, 자존감이 높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열정 가득한 모습만큼은 참 보기 좋았다.
그렇게 도착한 천당루.
이곳에서도 배우 금성무 씨가 에바항공의 광고를 찍었다고 한다.
보랑대도는 관광객들이 정말 많았는데, 천당루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사진 찍기 참 좋은 곳이었다.
그는 나에게 금성무 씨가 어디에서, 어떤 포즈로 광고를 찍었는지 알려주며
“너도 금성무 씨처럼 해봐! 내가 사진 찍어줄게.”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가 알려준 대로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그는 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아주 능숙하게 핸드폰을 조작해서 멋지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실 그의 말이나 태도는 '과잉' 친절이라 느껴질 만큼,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일단은 대만 사람들이 그동안 나에게 보여준 친절과 호의를 믿고, 지금의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남자는 나를 무사히 역까지 데려다주었다.
물론 가는 도중에,
저녁에는 타이동으로 돌아가는지, 본인이 저녁에 타이동으로 가면 자신과 만나줄 수 있는지, 본인과 저녁(+술)을 먹을 수 있는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내 직업, 내 급여 등을 물으며 자신이 한 달에 어느 정도 벌고 있는지, 자신이 츠샹에서 얼마나 부자이고, 권위가 있는 사람인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묘한 세함을 느꼈다. 나는 정말 연애의 '연'자도 모르는 바보지만, 이런 것은 또 눈치가 100단이라고!
내가 착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남자는 나에게 엄청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부담스러웠다. 정말 미안하지만,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츠샹역 인근에 도착하자, 남자는 나에게 “배고프니?”하고 물어왔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왠지 이 남자와 점심까지 같이 먹을 분위기라 정중히 거절했는데,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럼 목마르니?”라고 또 물어왔다.
안 그래도 이 남자와 헤어지고 나면 근처에 있는 우스란에서 밀크티를 마시려고 우스란 위치를 검색하고 있던 찰나였다.
“어,, 조금?”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츠샹역 근처에 위치한 테이크 아웃 음료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그러고는 이미 만들어진 아이스 홍차 한 잔을 가지고 나오더니 나에게 주었다.
“여기도 내가 사장이야. 이건 선물. 가면서 마셔.”
그렇게 마지막까지 그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떠났다.
나에게도 이런 인연이 생기는구나.
여행을 하면서 여러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많았지만, 이렇게 남자가 나에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낯설면서도 재미있었다. 당장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X톡으로 조금 전까지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엄마는 "아유! 그냥 잘 지내보자고 하지!"라며 무척 아쉬워하셨다. 대만 부자 사위를 둘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쉽다며, 지금이라고 다시 가서 잘 지내보자고, 그를 잡으라고 하셨다.
엄마의 농담은 정말 못 말린다!
드디어 혼자가 된 나는 잠시 츠샹역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다가, 츠샹에 올 때부터 꼭 가고 싶었던 도시락집으로 향했다.
全美行
No. 1, Zhongzheng Rd, Chishang Township, Taitung County, 대만 958
메뉴는 닭다리, 갈비, 돼지고기가 있었는데, 나는 무난하게 돼지고기 도시락으로 주문했다.
입구에서 주문하고 계산하면 번호표를 주는데, 그걸 취식구에 가져다주면 해당 도시락과 교환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나무판(도시락 뚜껑이었다.)에서 이 가게의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이 가게를 사랑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펀치후에서 먹었던 도시락도 참 맛있었는데, 츠샹 도시락은 또 다른 느낌으로 맛있었다.
함께 담겨있는 반찬들은 전반적으로 담백하면서 적당히 간이 되어있어서,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좋았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츠샹쌀이었는데, 이 츠샹쌀은 과거 일본 지배 시기 때 천황에게 바쳐지던 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찰기며 향이 아주 좋았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가게에서 판매하고 있는 츠샹의 기념품들을 구경했다.
대부분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이용한 쌀 과자나 농산물 가공품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특색 있는 기념품들을 구입하고 싶었기에,
츠샹역 근처에 있는 츠샹 농산물 직판장에 가보기로 했다.
池上鄉農會:池上直銷驛站 · 4.3★(2109) · Store
No. 193, Xinsheng Rd, Chishang Township, Taitung County, Taiwan 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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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대형 슈퍼마켓처럼 생긴 곳으로 츠샹뿐만 아니라 타이동 전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츠샹쌀로 만든 쌀 과자를 살까 하고 한참 고민하다가, 부피가 큰 것은 캐리어에 담지 못하니까 츠샹쌀 300g 정도를 구입했다.(크기는 작은데 은근히 무거웠다.)
그리고 타이동은 히비스커스가 유명하다고 해서 히비스커스 차도 한 세트 구입했다ㅎ
엄마는 대만까지 가서 왜 쌀을 사냐고 한 소리 하셨지만, 나중에 귀국 후 츠샹쌀을 드셔보시고는 "더 많이 사 오지 그랬어?'라며 무척 아쉬워하셨다.
사실 츠샹을 처음 방문할 당시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드넓은 논과 그곳에서 생산된 쌀이 유명하다는 것 정도였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인 이곳이 내게 이렇게 큰 감동과 여운을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츠샹은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이곳의 가장 유명한 특산품은 역시 쌀이지만 두부도 굉장히 유명하다고 했다. 때문에 미리 알아 놨던 두부 요리 전문점에서 두부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도시락을 먹고 너무 배불러서 디저트로 두유 푸딩만 먹어보기로 했다.
池上米之間 · 4.5★(47) · Rice restaurant
958, Taiwan, Taitung County, Chishang Township, 中山路通水巷12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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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오전 생산량은 다 팔리고, 현재 오후에 판매하는 푸딩을 만드는 중이라고 해서… 결국 먹지 못했다. 아아-, 아무리 배불러도 푸딩 먹을 만큼의 배는 있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제발 어떻게든 팔아줄 수 없냐고 사정했지만, 점원은 안된다고 딱 잘라 이야기했다.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이것은 신께서 내게 '츠샹에 한 번 더 와야 한다.'라고 계시를 내린 거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유 푸딩에 대한 아쉬운 미련을 남기고, 나는 다시 타이동으로 돌아갔다.
감사하고 고마웠던 보랑대도의 가족들...
그리고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을 츠샹의 슈퍼리치남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츠샹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이 남을 것 같다.
+ 여담이지만, 츠샹의 슈퍼리치남은 정말 그날밤 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일찍 자버린 탓에 새벽이 돼서야 문자를 확인해 버렸고, 우리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에 그날밤에 우리가 다시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