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츠샹에서 기차를 타고 약 30분을 달려 다시 돌아온 타이동.
대만 여행자 카페에서 마침 오늘 타이동 삼림공원에 행사가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안 그래도 츠샹에서 예상보다 일찍 돌아와서,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말 잘 되었다. 순식간에 내 다음 여행 루트가 확정되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버스 승강장으로 갔다.
삼림공원을 가기 위해 타이동 시중심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타이동에 도착했던 첫날, 잘못된 버스를 타고 허둥거리던 나는 이제 없다. 누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능숙하게 내가 가야 하는 목적지를 버스 기사님께 확인해 가며 버스에 탑승하는 나 스스로가 좀 멋있게 느껴졌다.
정오 때에는 따가울 정도로 뜨겁던 햇살이 오후 3시가 지나가니 조금 부드러워지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왔다. 나는 삼림공원 입구에서 천천히 공원 방향으로 걸어갔다.
행사 때문인지 공원 입구부터 사람들이 참 많았다.
사람들의 행복 가득한 웃음소리와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베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삼림공원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가드닝 페스티벌로 각 부스에서 다양한 품종의 꽃이나 묘목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 여러 부스를 구경했다. 한참을 거닐다가, 다리가 조금 아파올 무렵쯤,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중앙 무대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렸다.
잔디밭에서 멍 때리며 앉아있다가, 공원 내에 있는 비와호를 보러 가기로 했다. 타이동 삼림공원은 규모가 매우 커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나 역시 잠시 '자전거를 대여할까?'하고 망설였지만, 오늘의 '자전거 할당치(?)'를 다 썼기 때문에, 공원에서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
(사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자전거를 잘 탈 자신이 없었다.)
흥얼흥얼,
아무 노래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부르면서 산책로를 걸었다.
시원한 바람도 푸른 하늘도 다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여유로움이 좋았다.
"아!!! 그러고 보니.."
문뜩 최근 며칠 동안 비염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불과 며칠 전 가오슝에서만 하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줄줄 흐르는 콧물 때문에 정말 힘들었는데, 타이동에서는 콧물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매연을 모두 날려버린 탓일까? 최근 며칠 동안 계속 비염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생각해 보니 타이동에 온 이후로는 숨 쉬는 것이 훨씬 편해졌음을 깨달았다.
아,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타이동이 더욱더 사랑스러워졌다!
마치 유화 속 풍경처럼 여유롭고 한적한 비와호에 도착했다. 물에 비친 푸른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발길을 옮겼다.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삼림공원에서 연결된 해변공원 방향으로 걸어갔다.
해빈공원 역시 해 질 녘이 되어서 그런지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몰려드는 파도를 응시하였다.
-철썩-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새하얀 포말이 밀려들었다.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내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일들이 파도와 함께 밀려 사라지는 듯했다.
직장 동료들과의 갈등, 상사와의 갈등, 나 스스로가 겪고 있는 내적인 문제들, 자격지심과 우울감. 스스로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부정적인 생각의 연속들...
용서하고, 잊어버리자.
지나버린 부정적인 기억들은 애써 회상하려 하지 말자.
이 아름답고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며, 더 이상 옛 악연에 얽매려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 말자.
-철썩-
파도가 내 신발을 살짝 건들고, 뒤로 물러났다.
마치 그것이 '힘내!'라는 응원과 같이 느껴졌다.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돌려 , 바닷가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들을 바라보며, 나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을 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오늘도 미타이무를 먹으러 갔다.
같은 가게를 또 가면 재미가 없으니까 오늘은 구글맵에서 다른 미타이무 가게를 찾았다.
어쩌다 보니 오픈런을 하게 되었다. 가게가 넓어서 오픈런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들이 많아졌다.
많이 움직였더니 배가 무척 고팠다. 미타이무에 짭짤하게 간장으로 조려진 계란도 하나 추가해서 먹었다.
어제 먹었던 미타이무도 맛있었지만, 이 가게의 미타이무 또한 쫄깃한 식감과 짭짤한 맛이 너무나 좋았다.
역시 미타이무는 맛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번 여행자 서비스 센터에 방문했다. 월요일(19일) 뤼다오로 들어가는 배를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직원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이야기하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일요일이라 선박회사 쪽에서 영업을 안 한다고 했다. 직원은 작은 메모지에 뤼다오행 배 시간표를 적어주며, 내가 어떻게 푸강항구를 가면 되는지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비록 원하는 대로 미리 배 표를 예매할 순 없었지만, 이런 친절함과 섬세함이 날 감동하게 만들었다.
타이동에서 와서 여행자 서비스 센터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게 직업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모든 것이 낯선 나에게는 이 작은 친절이 너무나 소중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이 타이동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타이동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언제까지 택시에만 의존할 순 없다.) 타이동 기차역에서 버스터미널 오는 방법은 쉽게 찾았는데, 다시 버스터미널에서 기차역으로 가는 방법을 찾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버스정류장 앞을 얼쩡거리고 있으니 어떤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너 어디 가니?” 하고 물으셨다.
기차역 방면으로 간다고 하니, 아주머니는 버스 타는 곳을 알려주시고, 버스 아저씨께도 "얘 외국인인데, --에 내린데요.” 하고 말씀해 주셨다. 아주머니 덕분에 정말 편하게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새로운 룸메이트들이 도착해 있었다. 화렌에서 온 미대생과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해본다는 19살의 핑둥 아이였다. 핑둥에서 온 친구는 친화력이 정말 좋았다. 말이 너무 빨라서 약 40% 정도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미소와 붙임성이 좋아서 금세 친해졌다.
"나나언니, 그럼 내일은 뭐 할 거예요?"
"내일 동부 해안선 하오씽 버스를 탈 거야."
"그거 어디서 타요?"
"기차역."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저도 타고 싶어요."
"좋아!"
순식간에 내일 여정의 동행이 생겼다!
대만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너무 떨렸다.
벌써부터 내일의 여행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