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타이중의 첫인상은 잿빛이었다.
비구름으로 가득한 회색 하늘이 도시 위를 무겁게 덮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한 하늘 아래, 나는 일단 숙소로 향했다.
타이중 기차역에서 도보로 단 5분.
초역세권에 위치한 숙소는 6인실로, 공용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다소 소박한 공간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1박에 3만 원도 채 되지 않는 가격 때문에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깔끔했다. 생각보다 훨씬.
작은 창문을 통해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공용 사워실은 따뜻한 물이 콸콸 잘 나왔다.
물론 공사장 뷰는 덤이었지만, 그마저도 여행의 작은 에피소드처럼 여겨졌다.
나는 배정받은 침대에 몸을 눕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작이 좋다!"
긴장이 풀리니까 배가 고파왔다.
가방 속에서 이리저리 눌린 납작한 도넛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다.
대만 여행의 첫 끼는 뭘로 시작해야 하지?
아! 춘수당!
대만 밀크티의 원조라고 불리는 그곳을 떠올렸다. 버블티의 발상지.
타이중에 왔다면 가봐야 하지 않겠나? 구글맵에 찍어보니, 도보로 약 20분.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길가의 골목은 비에 어 축축했고, 바람이 목깃을 스쳤다.
감기 기운이 여전했던 나는 얇은 목폴라에 두툼한 후드티를 겹쳐 입고도 오들오들 떨었다.
캐리어 안에 두고 나온 경량패딩이 간절해졌다.
타이중은 바람조차 낮게 속삭이는 도시였다.
쓸쓸한 것 같다가도 다정한,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거리.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춘수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야외에 놓인 대기석에 앉아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자, 직원이 나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
메뉴판을 본 나는......까막눈이 되어버렸다.
한자라면 자신 있었지만, 중국어에서 간체자를 배운 나에게 번체자는 마치 새로운 언어처럼 느껴졌다.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결국, 조그맣게 인쇄된 영어를 더듬더듬 읽으며 메뉴를 골랐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엔 꼭 번체자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리라!)
내 차례가 되어서 드디어 가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계 버블티의 발원지'인 '춘수당'에 왔으니, 버블티를 한잔 시키는 것은 당연했고,
일단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우육면을 한 그릇 주문하기로 했다.
버블티와 우육면이 금세 나왔다.
우육면은 양이 적어보였고, 버블티는 너무 커보였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젓가락으로 몇 번 먹으면 끝날 것 같은 양이었다.
"에이, 이렇게 조금인데, 이걸 누구 코에 붙여?"
투덜거리며 버블티를 한 모금 마셨고,
"음?!"
눈이 번쩍, 피로가 스스륵 녹아내렸다.
탱글탱글한 타피오카펄이 목을 넘어가며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단맛이 입안을 감돌며 나를 깨웠다.
곧이어, 중간 굵기의 면을 국물과 함께 한입에 넣었다. 짭짤한 맛 뒤에 아주 살짝 매운 맛이 느껴졌다. 의외로, 꽤 맛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양도 많았다.
결국 버블티는 다 마시지 못하고, 남은 음료를 포장하기로 했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입구 바닥에 박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춘수당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 작은 동네 빵집에 들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고른 빵을 나도 따라 골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직장에서의 마지막 6개월
나는 늘 부당한 지시를 따라야만 했고, 내 의견은 무시당했다.
늘 기계처럼 살아왔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내가 결정한 길 위에 서 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이 시간.
참, 자유롭다.
그리고, 다행이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나를 향한 인사가 아닌 줄 알았다.
그런데, 분명 나에게 하는 인사였다.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가 눈부셨다. 나도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빠이빠이! 안녕!"
문뜩 지난해를 떠올렸다.
몇 번이나 죽음을 고민했고, 그때마다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때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지금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없었겠지......
타이중의 골목을 정처 없이 걸었다.
두 다리가 아파왔지만,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것을 눈에 담고자 열심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 자유롭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그때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 나의 소심함에 감사한다.
지금 이 도시가 나에게 선사하는 자유로움에 감사한다.
"내일 날씨가 좋으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지."
타이중의 유명한 디저트 가게인 궁원안과 앞을 지나갔다.
내일은 토핑이 듬뿍 올라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고 계획했다.
내일이 너무나 기대된다.
그 자체로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이렇게 내일을 생각할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찬란하고,
조금 더 달콤하고,
더욱 나다운 하루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