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대만 환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타이베이로 향하는 날이다.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조금 늦잠을 자도 좋으련만, 이상하게도 날이 밝자마자 눈이 떠졌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들이 모두 자고 있어서 침대에 누워 그동안 찍었던 여행 사진들을 구경하였다. 마음이 이상했다. 대만으로 출국할 당시만 해도 내심 '무슨 대만을 한 달씩이나 여행하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행 막바지에 다다르니 딱 한 달만 더 대만에 있고 싶었다.
대만은 이토록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가득한 나라였다.
"언니, 환도 여행 잘해요!"
"고마워, 너도 환도 여행 재미있게 하길 바랄게!"
조용히 짐을 챙겨서 방 밖으로 나오는데, 잠에서 깬 룸메이트 한 명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나는 이런 대만의 다정함이 너무 좋다.
숙소 밖을 나와, 산책할 겸 화롄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날씨가 흐리더니, 꼭 떠나는 날이 되면 날이 다시 화창해진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느껴졌다. 다음에 또 화롄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이렇게 화창한 날씨를 더 많이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과 하얀 구름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기차시간이 애매해서 일단 기차역 근처 맥도널드에서 간단하게 맥모닝을 하나 먹었다.
대만에서 음식 메뉴 선정이 힘들 때면 늘 햄버거를 먹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면 당분간 햄버거는 안 먹고 싶을 것 같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햄버거를 앞에 두고 낯선 도시 타이베이에서의 10일을 어떻게 보낼지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타이베이에서는 거의 10일가량 머무를 예정이기 때문에 타이베이 도심 여행부터 근교 여행까지 모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일단 며칠 뒤에 방문할 발레학원에 다시 한번 DM을 보내놓았다. 이 밖에도 간단하게 확인해야 하는 일들을 마무리한 후, 다시 화롄역으로 향했다.
햇빛이 들어오는 화롄역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 구조가 지난번에 본 츠샹역과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규모면에서는 훨씬 컸다.
이곳에서 나는 어제 여행을 함께 했던 상하이 친구를 다시 만났다.
상하이 친구는 이제 잠시 한국을 거쳐 제3 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는 조금은 어설픈 발음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진솔하게 나의 앞으로의 여정을 축복해 주었다.
"누나, 앞으로도 여행 즐겁게 하세요."
"응, 너도! 여행 잘하고, 나중에 한국에서 보자!"
기차에 올랐다.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 이 사랑스러운 여행의 끝이 다가온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빨리 한국에 가서 엄마표 매운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 반,
대만에 남아 안 가본 곳을 마저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이었다.
서서히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대만의 수도, 경제와 문화의 중심인 타이베이로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롄에서 타이베이까지는 약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기존의 계획은 기차 안에서 잠도 자고, 블로그도 하는 거였는데,
환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에 간다는 흥분감 때문인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시골 풍경들이 조금씩 도심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타이중부터 시작하여, 타이난, 가오슝, 컨딩, 타이동, 뤼다오, 화롄을 거쳐 드디어 타이베이에 왔다.
거대한 미로 같은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기차표 인증 사진부터 한번 찍어주고 본격적으로 타이베이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가오슝을 마지막으로 계속 한적한 시골 마을만 다니다가 갑자기 대도시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낯설고, 어안이 벙벙했다. 마치 갓 서울에 상경한 시골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여행용 캐리어를 잘 세워두고, 구글맵으로 타이베이의 숙소를 찾아보았다.
숙소는 메인 스테이션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3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햇빛에 땀을 줄줄 흘리며, 숙소 입구에 들어갔다. 숙소는 숙박과 카페(밤에는 펍으로 변신한다.)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체크인을 하자 직원은 웰컴 드링크로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내어주었다.
"음, 체크인이 3시니까, 3시 이후에 다시 와줄래?"
"좋아! 그럼 짐만 보관해 주세요."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직원이 친절하게 내 캐리어를 보관해 주기로 했다. 나는 캐리어 속에서 필요한 물건만 간단히 챙겨 다시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냅다 샹산으로 향했다.
타이베이는 한국인들이 여행하기 참 편한 도시였다.
지하철에는 한국어 표기가 되어 있었고, 차량 내 안내 방송으로도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도시는 복잡하니까, 길을 잃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익숙한 한국어 소리에 긴장하고 걱정했던 마음이 완전히 누그러들었다.
긴장감에 뭉쳐있던 어깨를 탁! 떨구자. 드디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겨났다.
샹산은 원래 석양으로 유명한 곳으로, 샹산 정상에서 타이베이 101과 타이베이 도시 야경을 보는 것이 타이베이 필수 여행 코스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내 여행은 언제나 '안전제일'이 중요하니까, 밝은 대낮에(그것도 제일 더운 시간대에) 샹산에 오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는 정상까지 쉽게 올라가는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었으나, 나는 그냥 구글맵이 알려주는 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저 멀리 보이는 타이베이 101을 보니 진짜 타이베이에 온 것이 실감 났다.
몇몇 여행 후기에서 '샹산 등산이 정말 힘들었다.'라는 내용을 읽어서, 걱정을 했었는데
시원한 물 한 병을 손에 들고, '세월아~네월아~'하고 오르니까 그럭저럭 오를만했다.
대만 환도 여행을 하기 전, 체력 증진을 목적으로 마을 뒷산을 매주 올랐던 것이 샹산에서 값진 결과로 돌아온 듯해서 조금 뿌듯했다.
날씨가 아주 좋아서, 저 멀리 타이베이 전망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타이베이의 상징과도 같은 타이베이 101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니 참, 감회가 새로웠다.
작년, 퇴사를 결심했던 6월부터
오직 대만 여행 하나만을 바라보며 버텨왔었다. 오랜 꿈이기도 했던 이 여행을 실현시키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여행도 이제 10일 뒤면 끝이 난다니.
한국에 돌아가면 이 여행을 계기로 무엇인가 '큰 변화'가 있기를 바라본다.
점심을 안 먹고 샹산까지 오르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팠다.
한국 관광객이 타이베이에 오면 꼭 가는 식당 중 하나가 딘타이펑이라고 하니 나도 한번 가보기로 했다.
딘타이펑 타이베이 101점으로 향하는 길에 유명한 지미의 달 버스 조형물을 발견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 조형물은 대만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인 지미 리아오의 작품 <달이 잊어나 봐>를 테마로 하고 있다.
'잊혀진 역'에서 출발하여 '기억한 역'으로 운행하는 곰돌이 버스 기사의 버스 안에서 보름달을 안고 있는 한 소년이 표현되어 있다. 버스 뒤에는 주변 경치를 반사하는 스마일 행성들이 있으며, 차 지붕에는 귀여운 파란색 어린이가 스마일 달을 양손 높이 들며, 사람들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참고: 타이베이 관광 웹사이트>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지미의 달 조형물을 바라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지미의 달 버스 조형물을 지나자 금세 도착한 타이베이 101.
대나무를 상징하는 독특한 모양새의 이곳은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하나의 랜드마크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나는 이곳 지하 1층에 위치한 딘타이펑 타이베이 101점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음에도 식사를 기다리는 인원들로 식당 입구가 몹시 북적였다.
카운터에 가서 인원수를 말하면 순서대기표를 나눠주는데, 대기표에 있는 큐알코드를 통해 딘타이펑 사이트에 접속하면 그곳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도 있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있어서 굉장히 편리했다.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이 오는지, 중국어부터 영어, 일본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안내가 되고 있었다.
나는 1~2인 대기라서 차례가 생각보다 금방 왔다. 여러 후기글을 읽어보니 1시간 이상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것에 비하면 정말 조금 기다린 셈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으로 미리 메뉴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금세 메뉴를 주문할 수 있었다.
딘타이펑하면 샤오롱빠오즈가 가장 대표적인 메뉴니까,
일단 샤오롱빠오즈를 한 접시 시키고, 매운 소스가 들어간 새우만두도 하나 더 시켰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맛은 한국에서 먹었던 딘타이펑의 샤오롱빠오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만이나 한국이나 샤오롱빠오즈는 맛있었다.
대신 매운 소스가 들어간 만두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는데, 생각처럼 엄청 맵지는 않았지만 알싸한 매운맛이 입안 가득 맴돌아서 굉장히 감칠맛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매운 소스가 들어간 만두가 정말 좋았다.
여러 명이 함께 왔다면 다양한 음식들을 많이 시켰을 텐데, 혼자이기 때문에 여러 딤섬을 골고루 시키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타이베이에서의 첫 식사를 딘타이펑에서 배부르게 먹고,
소화도 시킬 겸, 타이베이 101 근처에 있는 쓰쓰난춘으로 향했다.
쓰쓰난춘은 과거 국민당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살던 곳으로 현재는 일부 건물 몇 동만이 남아서 문화 시설 및 예술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만을 여행하며 경험했던 다양한 '도시 재생 사업'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대만은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참 많다. 칙칙한 잿빛의 건물들은 세월이 지나면 무너지고, 철거되기 마련인데, 대만은 그런 것이 없었다. 대만은 결코 낡고 오래된 것들을 부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과 역할을 부여한다. 나는 이 낡고 오래된 것들이 새로운 것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주말에는 이곳에서 프리마켓도 열린다는데,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을 때는 별도의 프리마켓이 운영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일부 관광객들이 타이베이 101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뿐이라 조금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쓰쓰난춘 건물 안에 있는 기념품 샵을 구경하다가, 대만 지도가 그려진 귀여운 엽서를 하나 구입했다.
그동안 내가 지나왔던 지역들이 표시되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반갑고 친밀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가본 곳과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쭉 살펴보면서 다음 대만 환도 여행을 계획해 보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나가던 외국인 관광객에게 사진을 한 컷 부탁했다.
중국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었다. 그가 나에게 멋진 포토존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중국어에 비하면 영어는 정말 비루한 실력이라. 내가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외국인 남성은 마치 오랜 친구인 듯, 열정적인 포토그래퍼 모드로 변신하여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주었다. 나는 그가 찍어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굿! 나이스! 씨에씨에!"를 말해주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남겼으니, 이제 더 늦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퇴근 시간이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를, 여유롭게 지나갔다. 쓰쓰난춘에서 구입한 엽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 하루가, 이 순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문뜩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