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타드 입고 햄버거 사러 간 여자

by 발레 언니

정말 정말 버티다 버티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아슬아슬 지각을 면할 시간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계좌에 찍히는 월급이 좋으면 그걸 지급하는 대상에도 의리를 보여야 하건만, 언제쯤 내 안의 불티를 다시 붙일 수 있을까. 새벽녘 찬 입김을 호호 불며 광화문 골목을 종종걸음으로 옮기던 나.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며 '오늘 나 좀 짱인듯' 자뻑하며 퇴근하던 나.

쉬는 날, 회사에서 걸려온 다급한 전화를 받고 장대비를 뚫고 튀어가던 나.


일에 빠져서 1년에 주어진 휴가의 반을 쓰지도 못하던 내가, 지금은 내년 휴가를 당겨 쓸 수는 없을까 머리를 굴린다. 쉬지 않고 일한 대가를 돈으로 보상해준다고 해도 노땡큐다, 이제.


내 안의 불티가,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출근하지 않는 날, 1회 쿠폰 수강을 하러 동네 발레 학원을 뒤졌다. 그냥 가면 아마도 자리가 있을 테지만, 그 학원 방침이라니까 예약을 하고 답장을 기다렸다. 들쑥날쑥한 스케줄 탓에 수업 한 시간 전에야 수강신청을 해놓고 회신이 늦는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기다리는 동안 머리를 만졌다, 매트 운동에서 구르기를 해도 머리카락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돌돌 말아 그물망에 넣고 유핀을 열개쯤 꽂았다. 회신이 아직이다, 타이츠를 신고 레오타드를 입고 워머와 조끼와 방한용품을 겹겹이 입고 소파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내가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없어지지 않았다. 지금쯤 출발해야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니까 일단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숫자 1이 없어졌다, 드디어. 신이나서 마구 노래를 불렀다. 학원 주차장에 도착했는데도 회신이 없다. 시계를 보니 이미 수업 시간이 되었다. '회차 차량' 메시지가 전광판에 켜졌고 나는 그 건물을 나왔다. 수업시간에 임박해서 '오세요'라고 회신하면 아마도 내가 못 갈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이미 완벽히 준비해서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걸 동상이몽이라고 하나.


주차장을 나와 집으로 가려니 곧 점심시간이다. 그냥 집으로 차를 몰기에는 아쉬워서 어디를 들를까 잠시 고민했다. 이제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카페를 가도 예전과 같은 낭만을 느끼지 못한다. 차를 마셔도 되지만, 카페의 어원이 프랑스어로 커피 또는 커피하우스이니만큼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카페라는 공간을 반 만 사용한 기분이랄까.


지난주 아들이 졸라서 주문해 먹었던 수제 햄버거 집이 생각났다. 햄버거 번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그곳으로 갔다. 단정한 무용 전공생 머리를 하고, 속에는 타이츠부터 레오타드, 워머, 넉넉한 무용 바지까지 모두 갖춰 입고 상체만한 커다란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햄버거를 사러 간 여자.


오늘은 글렀고, 발레를 하려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 출근은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가는 사람이, 오라고 하지도 않은 발레 학원은 잘도 챙겨 입고 간다. 발레를 하고 햄버거를 먹었다면 환상의 여정이었을 오늘 아침이었겠지만, 레오타드 입고 햄버거를 사러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차곡차곡 입었던 발레복을 모두 벗어 예쁘게 걸어놓고, 머리를 고정하느라 꽂았던 수많은 유핀을 빼서 제자리에 넣은 뒤 거실에 나와 존맛탱 햄버거를 먹었다. 발레 수업을 허탕 치고 채운 이 칼로리는 내일 저녁 모두 태워버리면 그만이지만, 아쉽게도 발레수업을 듣지 못해 갖춰입은 완벽했던 오늘의 ootd가 무안할 따름이다.


일에 대한 열정은 식어버렸지만, 아직 발레에 대한 열정은 아직 그 불씨가 온몸에 가득하다.


사회에서는 아마도 꺼져가는 나이,

발레의 불티가 꺼지지 않는 지금이 그래도 나에게는,

레오타드 입고 햄버거 사러 간 여자에게는 오늘이 전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