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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레 언니 Jul 15. 2022

취미로 발레 한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는 나이

매거진에서 몇 번 언급한 것 같다, 지금 이 시간이 이러고 있는 이유에 대해.

- 한창 일할 나이에 집에 있는 이유

- 직장인이라면 가장 바쁠 오전 9시 10분에 커피를 마시며 '유미의 세포들'을 다시보기 하고 있는 이유

- 오후 3시, 아들내미 과학수업에 셔틀하고 있는 이유

- 아침, 점심, 저녁, 또 저녁 하루 네 번 밥상을 차리며 하루 종일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리는 이유

- 오전 네 번, 저녁 세 번. 일주일에 7번 발레 클래스를 듣는 이유


치부를 한 번 드러내니 더 이상 그것은 결코 나의 약점이나 인생의 오점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에서 정신과나 상담센터에 가면 얘기를 해보라고 그렇게 들들 볶나보다.


직장 상사의 괴롭힘으로 잠시 회사를 떠나 집안일 말고는 정을 붙일 곳이 없던 나는 신기하게도 발레에 푹 빠졌다. 땀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헬스장에 가도 땀이 나기 직전에 운동기구를 내려놓는 내가 발레 스튜디오에서는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릴 때 기분이 좋아진다. 스물넷에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2년을 조금 넘게 보냈고, 그다음 크고 작은 회사를 거쳐 최근 다니던 직장 15년을 합해 거의 20년을 일하다 갑자기 시간이 생긴 나라는 직장인은 그 시간을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재취업할 생각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해준다는 국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도 남는 시간을 그냥 두지 못해 기타, 피아노, 필라테스를 비롯해 한의원, 병원 치료 등등을 등록했지만 그때부터 끊지 않고 계속하는 것은 발레뿐이다. 


회사 후배가 안부 전화를 걸었다, 건강 관리 잘하라는 후배의 말에 '나 발레하고 있어'라고 했더니 '언니, 잘 어울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열심히 해서 건강히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이따금씩 나를 걱정하는 한 선배 역시 건강 잘 챙기라며 신신당부를 하길래, '선배님, 저 발레 배워요.'라고 하자 박장대소했다. 그와 함께 돌아온 답은 '지랄 풍신 떠네.'였다. 멋쩍은 나도 선배를 따라 전화기를 붙들고 웃어버렸다, 푸하하하. 


'열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발레야. 우리 나이에는 슬슬 산책이나 다니는 거야.'라고 말한 분도 있다. 나와 당신을 '우리 나이'라는 집합 명사로 묶어버린 그분은 바로 작년에 칠순 잔치를 하신 우리 시어머니.


아, 내 나이에 취미로 발레 한다는 말을 쉽게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내 얘기를 잘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했다가도 이내 후회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아, 괜히 말했네.'라고 후회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나이에 지랄 풍신을 떨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 다음을 한 번 읽어보자. 시간이 남아도는 시한부 백수이자 주 7회 발레 클래스를 수강하는 취미 발레인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잠이 들기 전에 다음 날 수업에 입을 발레복을 준비한다. 옷장에서 몇 안 되는 발레복 중 레오타드, 팬츠, 스커트, 슈즈를 골라 놓는다. 그중 스커트는 쉽게 주름이 지기 때문에 스팀 다림질이 필수다. 


10시에 시작하는 아침 클래스를 듣는 날은 7시에 일어나 몸을 바삐 움직인다, 그래야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고 속이 비어야 운동을 할 수 있다. 허기지면 또 힘이 없어서 바에 너무 기대게 된다. 그렇다고 아침 '식사'를 하면 몸이 무거워서 웜업과 점프를 하지 못하니 한입거리 식사를 해야 한다. 손가락 두 개 길이만 한 치즈와 커피, 빵 한 입과 커피 같은, 이 나름의 식사는 수업 두세 시간 전에 끝내고 소화를 시킨 후에 클래스에 들어간다. 


8시 저녁 클래스를 들으려면 저녁 식사는 할 수 없다, 몸이 무겁기 때문에. 오후 5시 전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단, 적당히 가볍게 먹고 속이 가벼운 채로 수업에 가야 한다. 식사를 하고 수업에 간 날은 매트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후회막심이다, 엎드린 채 해야 하는 등 운동과 누워서 하는 복근 운동에서 배에 힘을 줄 수가 없고 속이 더부룩해 웜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 여파는 바 워크와 센터 워크로 까지 이어져 수업을 날리게 된다. 그때 이후로 지키는 루틴이 바로 수업 시작 두세 시간 전부터는 먹지 않는 것이다. 


수업 전에 식사를 조절하는 이유는 속이 불편한 것을 줄이려는 것도 있지만 발레복, 레오타드 때문도 있다. 상 하의가 붙어 있는 유니타드, 바디수트, 원피스 수영복과 같은 레오타드를 입으면 화장실에 가기 매우 불편하다.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 내가 발레 수업 전에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매일, 또는 하루에 두 번 클래스를 듣는 날에는 식사다운 식사를 언제 하는지 궁금할 수 있다. 사실 발레 가기 전에는 배가 고프다, 그렇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세 모금이면 끝나는 바닐라라테를 마시고 나면 잠에 들 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다. 다음 날이면 속이 오히려 편안하다. 점심식사를 한 상 차려먹고 아침, 저녁을 가볍게 먹는 것 만으로 하루 생활하는 에너지와 격한 운동에 필요한 열량은 충분하다.


발레를 갓 시작한 아주 입문반 시절에는 선생님이 '10초만 쉴게요.'라고 틈만 주면 스튜디오 문을 박차고 정수기로 뛰어가 물 한 모금을 꼭 마시고 왔었는데, 지금은 두 시간 정도 격한 운동은 물 없이도 거뜬하다. 아마 커피를 줄이고 평소 수분 보충을 하게 되니 몸속에 물이 저장되고 있는 모양이다. 


수업에 다녀와서는 쓰지 않아야 할 곳에 쓸데없이 힘을 주는 탓에 뭉쳐있는 근육을 풀어준다. 폼롤러나 마사지볼로 셀프 마시지를 하기도 하고 요가링을 착용한 채 생활하기도 하고 남편을 대동해 나를 밟으라고 하기도 한다. 뭉친 근육을 반드시 풀어줘야 벌크 업되지 않으며, 길고 속이 꽉 찬 몸이 만들어진다. 


땀에 젖은 레오타드와 그 외 발레복은 바로 세탁해야 한다. 주름지기 쉬운 스커트는 습기를 묻혀 옷걸이에 걸어 둬야 하기 때문에 집에 와서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수면, 식사, 식습관, 일상생활까지 모두 발레를 위해 움직이다 보면 순간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다, 내가 이렇게 한 가지를 열심히 해 본 적이 있나?


이렇게 바쁘다, 지랄 풍신을 떨려면.


나는 너무도 진심인 이것에 '지랄 풍신, 그 나이에 무슨'이라고 웃는 이들을 애써 설득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가 진심인 이것에 열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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