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가 있다, 이 만큼이면 남들 하는 만큼 다 했으니 나도 여기쯤에서 멈춰도 되겠다 생각이 들 때. 발레는 그때가 질기게도 힘들다.
'쁠리에, 빠쎄! 무릎 들어요, 턴아웃! 발 끝 포인! 앙오 발란스, 3초라도 버티세요.'
발레 선생은 초를 천천히 센다. 필라테스 선생보다 더 천천히 세는 사람을 이 발레 학원에서 만날 줄이야.
'하나. 둘. 갈비뼈 닫아요. 배 짧게 잡아야 버틸 수 있어요. 뒤로 넘어가지 않아요, 셋.'
오른발 발가락과 메타타살에 의지해 바들바들 떠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자세를 고쳐 바로잡아 60초 같은 3초를 겨우 버텨내니 등 날개뼈 사이로 물줄기가 빠르게 타고 내렸다, 죽을 것 같아도 이 땀이 피부를 가르고 흘러내리는 이 기분을 알고 나면 나는 하나부터 다시 카운트를 하자고 해도 콜이다.
동작을 다 하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이미 발 뒤꿈치를 내리고 싶지만 선생은 한 번 더 주문한다. '알라스콘, 알롱제 다시 한번 길게 펼쳐요. 아직이요. 천천히 뒤꿈치 내려요, 푹 꺼지지 마세요.'
끝까지 근육을 놓지 않고 마지막 자세까지 완벽하게 하고도 그녀의 잔소리는 계속된다.
'턱 들어요, 시선 어디죠? 그렇죠, 어깨 내려요, 갈비뼈 닫고, 엉덩이 힘! 팔에 힘 빼세요, 됐어요.'
발레 선생의 마지막 주문을 해내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다시 흐른다. 땀이 안 나는 체질인 줄 알았던 내 몸에서도 땀이 흘러내린다는 것을 경험한 순간. 필라테스 선생이 땀구멍을 열어 줬다면, 발레 선생은 땀을 내도록 해 준 셈이다. 땀이 내 등을 타고 흘러내릴 때, 잠자코 있던 근육들을 움직이게 한 것 같은 보람이 있어 이 느낌이 너무 좋다. 아직도 신기하다, 으쌰 으쌰 운동기구를 든 것도 아니고 전력질주를 한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서 오로지 발레 동작을 한 것뿐인데 땀이 흐른다. 오일과 로션을 섞어 발라도 얼마 안 가 바스락 소리 나는 거칠고 건조한 피부에서 땀이 흐르는 걸 보니, 아, 나도 아직 숨 쉬고 있구나를 깨닫는다.
내 피부가 계속 숨 쉬도록, 땀을 내도록 관리해야지.
호흡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너무 숨이 차서, 너무 힘이 들어서, 더 이상 사용할 근육이 바닥나서.
발레를 하다가 이렇게 체력이 바닥을 칠 때 발레선생이 주문을 왼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그때 더 펼쳐요. 목을 길게, 다리를 길게, 어깨에서 팔을 더 뽑아요.'
그때가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라고 했다.
정도껏 하자, 이만하면 충분하잖아,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여기서부터는 대충 해도 될 걸, 쉬엄쉬엄 하지 뭐. 발레가 아니더라도 공부, 육아, 업무,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아마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동료 압박, 눈치, 체면, 남의 시선 이런 것에 핑계를 댔던 때도 있었다.
결국 나 스스로 결정했을 뿐인데 말이다.
나 스스로 문을 두드리고 시작한 발레에서 감춰졌던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고 고쳐 바로잡는다. 이렇게 바로잡은 내 모습이 앞으로의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아직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나를 알아차리게 되었으니 다행 아닌가.
어제저녁에 결제했다가 졸려서 마치지 못한 영화를 오늘 아침에 막 끝냈다, 발레 다큐멘터리 '퍼스트 포지션'. 2010년 경에 촬영한 이 다큐멘터리에는 발레 분야에서는 최대 규모의 미국 발레대회에 출전한 여섯 명의 소년, 소녀들이 나오는데 임선우 발레리노도 YAGP (Youth America Grand Prix) 우승자로 등장한다.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11살 아란 벨은 방에 있는 풋스트레쳐, 포인기, 턴테이블 같은 발레 도구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발가락 근력운동기구를 선보이며 '가능한 만큼 다 하고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다섯 개를 더 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발레리노에게 일상적인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내 발레 선생의 말이 귀에 울렸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체력이 바닥을 쳤을 때 다시 한번 더 펼쳐요.'
발레에서 나의 한계를 넘어서 보기로 결심했다. 뒤꿈치를 몸 쪽으로 더 당겨본다. 발가락을 거울 쪽으로 더 뽑아본다. 장요근, 복근, 엉덩이 하부 근육을 강화시켜 지금은 꿈쩍도 하지 않는 다리를 90도까지 들어볼 생각이다. 90도에 이르렀을 때 1도를 더 올려봐야지. 그렇게 나의 한계를 넘어볼 생각이다.
재작년 회사에서 한 번 고꾸라졌을 때, 이미 나의 체력과 경력과 인생은 바닥을 쳤다. 빗방울이 물 위에 내리면 그 충격으로 수면에 왕관 모양을 만들며 튀어 오른다. 아주 작은 물방울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때에는 제 모양이 깨지기 마련. 나의 사회적 모양도 그렇게 깨졌다고 생각하자. 다시 튀어 오를 때 왕관 모양을 만들지, 아니면 작게 부서져 공기로 증발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나는 이미 바닥을 쳤고 이제 오를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말을 기억하자, '체력이 바닥을 쳤을 때 다시 한번 더 펼쳐요, 그때 한계를 극복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