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훌쩍 컸는데, 나는 한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by 발레 언니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고 챙겨보는 연례행사들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연초,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되는 프리드 로잔 콩쿠르이고 또 하나는 늦가을에 열리는 월드 발레 데이이다. 1년에 한 번 세계 유명 발레단을 주축으로 발레를 기념하는 '월드 발레 데이'는 보통 10월~11월 사이에 하루를 정하는데 햇수로 9년째이다.


올해 월드 발레 데이도 역시나 영국 로열발레단이 내 마음속 최고 프로그램을 실황으로 보여줬다. 폴드 브라와 시선처리만 봐도 느껴지는 발레에 진심인 단원들, 그리고 눈여겨보던 우리나라 발레리나가 티칭 마스터에게 칭찬을 받으면 애국심이 갑자기 솟구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로열발레단의 월드 발레 데이 영상에 눈이 갔던 건, 올해 초 프리드 로잔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한 17세 발레리노가 그 영상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신체조건 때문인지 다른 단원들보다 더 많이 화면에 잡혔고, 일면식도 없는 나는 괜스레 뿌듯했다.


'아, 이 친구는 발레 하러 미국에서 영국까지 날아갔구나.' 이 발레리노를 처음 본 지 거의 1년이 되어 간다.


수상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장학금을 받고 올 가을 미국으로 날아간 우리나라 열여섯 살 발레리나는 지금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서 집시 소녀를 추고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2022년 1월은 발레 유망주들에게도 나에게도 있었고, 수개월이 흐른 지금의 늦가을도, 첫눈이 내린 겨울도 같다. 그 친구들의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새끼들도 아닌데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들었던 감정과 같은 것이 올라왔다.


냉장고, 찬장, 거울, 식탁, 장식장 할 것 없이 집안 곳곳에 아이들 성장 사진이 붙어있다. 펼친 가제손수건 하나로 몸통을 다 덮을 만큼 작던 아이가 벌써 엄지발가락에 거뭇한 털이 자라기 시작했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지도 못해 손가락 세 개를 어설프게 펴고 방긋 웃으며 사진 찍던 아이가 지금은 아이폰으로 제니처럼 포즈를 하고 셀카를 잘도 찍는다. 사진을 감상하며 집안을 돌면 아이들의 성장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회사일, 집안일, 사회생활,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감과 함께 여전히 아등바등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아이들은 저만큼이나 땅에서 멀리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 컸는데 도대체 나는 뭘 한 거야.'


바빠서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갑자기 생긴 건지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보인다. 이것들은 작년 겨울 갑자기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랄 동안 나에게 변화를 찾자면 주름, 이것 하나가 눈에 띈다. 눈에 거슬린다는 말이 맞겠다.


로잔 콩쿠르 예선 심사 후 파이널리스트가 곧 발표되면 내년 초 결승을 치르고, 누구는 미국으로 누구는 영국으로 둥지를 떠나 꿈 하나만을 보고 가겠지. 나도 내년에 가능하다면 이직을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없어 또 회사일, 집안일, 사회생활,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감과 함께 여전히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우울감이 더 자라지 않도록 더 발레에 빠져보려고, 이렇게 또 아등바등하는 삶을 택한다.


발레 수업에 가기 전, 내 루틴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만 뻗으면 닿는 옷장을 열어 생각에 잠긴다. 주방 싱크대 아래 구석에 등을 대고 주욱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쪼그려 앉으면 주방과 거실, 복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나의 최애 스폿이다. 또 한 곳을 꼽자면 발레 옷장이 있다. 우리 집에서 내 마음이 놓이는 공간 중 하나. 월드 발레 데이가 끝나면 이어지는 블랙프라이데이에 이곳을 저렴한 금액으로 조금 더 풍성하게 채웠다. 국내에서 배송되는 것들은 이미 세탁을 끝낸 후 옷장에 자리 잡았고, 바다 건너오는 직구 물품은 여전히 항해 중이다. 이것이 발레 옷장에 입주하면 아마도 크리스마스가 임박했을 때 일거다. 그것을 입고 수업을 한번 다녀오면 한 해가 저물겠지. 그러면 다시 프리드 로잔을 보고, 그 유망주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공연을 몇 개 보고, 여름, 가을, 월드 발레 데이, 겨울, 블랙프라이데이, 크리스마스, 이렇게 또 사계를 보내겠지.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켜야 했던 것들을 지키며 살아내는 삶을 선택했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외로이 애썼고, 이게 맞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우격으로 설득했다. 비단 나와 내 남편만의 얘기가 아님에도 갑자기 서러워지는 건 왜지. 나는 발레라도 하는데 남편은 뭘로 삶의 스트레스를 이겨낼까, 40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든다.


내가 그나마 잘하는 것, 밥이라도 계속 맛있게 차려줘야지. 내일 지을 밥에 넣을 잡곡을 물에 불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남편의 퇴근을 기다렸다.


그래, 발레리나처럼 180도 데벨로뻬를 차지도 못하고 그랑 줴떼를 뛰지도 못하고 발레단에 입단할 일도 없지만 발레 수업을 듣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숨을 쉬고 있으니 이걸로 됐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아이들이 잘 크고, 남편이 집에서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걸로 됐다. 그러면 내 마음도 놓인다.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을 나는 이것에 써왔던 것이다. 소란하고 복잡한 바깥세상과 구분되는, 가족들의 마음이 놓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는 것 같다.


욕심과 한숨과 조바심과 답답함으로 막혀있던 마음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나는 내 할 일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발레 달력에 빈 공간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고 싶다. 아이들이 훌쩍 크는 만큼의 물리적인 큰 변화는 없을 테지만, 내 일상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킬만한 그 무언가. 아직은 형태가 없는 그것이 손에 닿을 듯하다. 분명히 발레 안에서 나는 그 무형의 것을 보고 만질 것이다. 그날이 달력의 어느 날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 생각에 오늘도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