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압박, 피어 프레셔

by 발레 언니

발레와 함께한 시간이 흐르면서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이 있다, 그중 하나는 '발레 한 지 얼마나 됐어요?'.

자꾸만 반내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내 실력이 부끄러워서겠지.

몇 년 차예요,라고 하면 오래 다닌 사람처럼 들릴지도 모르니까 정확하게 '몇 년 몇 개월이라고 해야지'를 레오타드를 입을 때마다 속으로 왼다. 그러나 저러나 못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상대적으로 배운 기간에 비해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관종병이 생겼나 보다.


학원을 꾸준히 다니다 보니 새로 등록하는 분들이 한 달, 세 달만에 안 나오시거나 분기에 네다섯 번씩 드물게 나오시는 걸 자주 본다. 금방 포기하는 그분들을 보면 속상하면서도 태생이 아싸라서, '그만두지 말고 꾸준하게 다녀봐요 우리' 이런 격려의 말도 잘 못한다. 그분들이 계속 오래 다니셔야 다양한 레벨이 비는 요일 없이 편성될 텐데 아쉬움이 크다. 다음 분기에 그분들을 만난다면 열심히 다니자고 인사를 건네볼까.


20대 젊은 회원이 등록하면 눈치채지 못하는 거리에서 주의 깊게 관찰한다. 왜냐하면 젊을수록 몸이 금방 변하고, 내 나잇대와는 다르게 순서를 바로 외우기 때문에 실력이 순식간에 업그레이드된다. 그녀들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도 내게는 귀한 수업이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젊은 친구들을 보면 '5년만 더 빨리 올걸. 그때 넷플릭스 구독하지 말고 발레학원 등록할걸.' 후회가 밀려온다.


내 시야가 좁았던 걸까.

나보다 한참 언니이신 회원님들이 '젊을 때 배우니까 금방 늘었네. 나는 5년 넘었는데 늘지를 않아. 지금처럼 열심히 다녀, 뱃살도 좀 들어간 것 같고 너무 예쁘다.'라고 과찬을 늘어놓으신다. 내가 20대 젊은 친구들을 동경할 때 누군가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도 한참 언니인 그분들께 좋은 수업 도구가 됐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발레학원은 홀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 수업이 끝나면 다음 수업이 바로 시작된다. 일찍 도착하면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니 수업시간에 딱 맞춰가는 편이다. 그렇게 제때 도착해도 가끔 전공생 수업은 종강이 지연되기 마련인데, 이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친구들의 움직임은 나에게 발레 공연의 군무 한 장면 같다. 밀착된 레오타드에 허리벨트만 착용한,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던, 가늘고 길게 뻗은 근육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전공반에는 한 여름에도 에어컨을 거의 틀어주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수업이 끝나 문이 열리고 90도로 인사하며 쏟아져 나오는 전공생 친구들과 함께 후끈한 증기도 몰려나온다.


전공반 수업이 성인반 수업과 다른 것은 과학적 공기 하나만은 아니다. 나의 뮤즈, 선생님의 톤이 다정다감하지 않다. '뛰어. 뛰라고. 왜 안 뛰어? 뛰어!!' '싱글, 더블, 싱글, 더블, 더블 두 번. 왜 몰라!' '순서를 왜 안 외워? 안 외운 거야 연습이 부족한 거야 아니면 지금 이게 너한테 어려운 거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전공반 수업의 공기가 긴장된 것은 높아진 온도와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복장만 갖춘 전공반 친구들이 나오고 장비만은 풀 장착한 우리 취미 발레인들이 입장하면 창문을 먼저 여는 것으로 공기를 전환한다, 그래도 전공반의 무형적 공기가 약간은 남아서 나도 모르게 매트 웜업 운동을 비장하게 시작한다.


처음 발레를 배울 때 등록했던 학원을 꾸준히 다니다가 올해 여름 정해진 시간에 맞추느라 다른 학원 수업을 추가로 듣기 시작했는데 다른 선생님, 다른 회원, 다른 순서, 다른 수준이 펼쳐졌다. 본 학원에서 기본기를 빡세게 잡아주신 덕분에 바 워크나 기본 센터 동작은 따라 하기 무난했다. 새로 등록한 학원은 조금 자유로운 분위기다, 회원님들의 평균 나이가 꽤 높아 보이는데 근력이 엄청났다. 반면, 폴드 브라라고 하기에는 과장된 팔의 움직임과 사방으로 자유로운 뒷 목이 약간 방해가 되기도 했다. 배울 것은 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덜어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교과서가 되어, 발레학원에서는 배울 것이 넘쳐나나 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저 나로 인해 전달되는 발레 피어 프레셔가 전향적이기만을 바라면 욕심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 거울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발레 스튜디오에서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 준비하던 시험을 앞두고 발레를 잠시 접어둔 발레학원 동생에게 조그만 응원의 선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책과 씨름하느라 본인은 나무 막대기가 되었는데 나는 발레단원으로 변했을 것 같단다.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 발레를 배우다 보니 우리는 서로의 변화를 목격한 장본인들이다. 그 동생이 시험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녀의 기대치만큼 발레단원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하다. 내심 인사치레라도 기대를 잔뜩 담아 메시지를 보내온 동생이 고맙다.


또 하나 이루고 싶은 발레 목표가 생겼다, 긍정의 동료 압박을 전달하는 취미 발레인이 되는 것.

나의 폴드브라와 시선처리, 기본 동작, 연결 동작들이 누군가에게 전향적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