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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Aug 31. 2020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9)

"주문하시겠어요?"


"아...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는다. 점심시간에 회사 주변 커피숍은 직장인들로 가득하다. 음료를 앞에 놓고 수다를 떨고 있는 여직원도 보이고, 커피 맛을 음미하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남자 직원도 보인다.


이런 풍경을 보면 대부분의 직장인들과 커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심식사 후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 자체로 힐링이자 업무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리라. 아마도 커피가 없어진다면 우리나라의 업무 생산성은 절반으로 줄어들 것만 같다.


나 역시 하루에 커피 몇 잔은 늘 마시면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아메리카노 외에 다른 커피는 잘 마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커피의 종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커피 이름을 주르륵 나열하면서 폼나게 주문하는 팀원들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젊은 세대와 가까워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커피를 주문할 때 다른 것을 시켜볼까 하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커피숍 벽면에 붙어 있는 수많은 메뉴의 이름을 보다 보면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다 보니 그냥 앞사람이 시키는 것을 따라 주문하든가 아니면 가장 무난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게 있어 커피는 '아메리카노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인 셈이다.




실제로 한 번에 결정하지 못하고 결정을 유예하거나 타인에게 미루는 등의 결정 장애가 일어나는 현상을 '햄릿 증후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대인에게 있어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택해야 할 일로 넘쳐나는 시대에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바로바로 결정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물냉면이냐 비빔냉면이냐를 놓고도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이 우리들 아니던가.


일반적으로 대안이 늘어날수록 선택에 대한 만족도는 줄어들어 선택을 미래로 연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여러 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이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의 자유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행복하다고 되어있지만, 실제로 인간은 많은 선택권 앞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와 관련한 실험으로 스탠퍼드 대학의 마크 레퍼 교수와 콜럼비아 대학의 쉬나 아이옌거 교수의 ‘잼 있는’ 실험이 있다.

슈퍼마켓에 6가지 잼과 24가지 잼을 시식할 수 있는 부스를 각각 설치하고 고객들을 관찰했더니, 고객들이 많이 멈춘 곳은 24가지 잼이 있는 부스였지만 구매가 많이 일어난 부스는 6가지 잼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구매를 하려는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많은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결과였다.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오히려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생기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만족도를 떨어뜨린다고 한다. 남들이 하는 선택을 따라 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홈쇼핑에서도 어떤 상품을 소개할 때 이미 구매한 고객들의 추천으로 가득한 체험기나 상품평을 종종 보여준다. 내가 써봤더니 좋더라,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추천할 생각이다 하는 내용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고객이 선택 스트레스를 최대한 받지 않고 빨리 선택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장치들이다. 그래서 보통 구성을 선택하게 할 때도 3가지 이상의 옵션은 잘 만들지 않는다.


음식점에서 '오늘의 추천 메뉴'나 '요일 메뉴'를 적어놓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뭘 먹어야 좋을지 모를 때 주방장 추천 메뉴를 선택하거나 점원에게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또한 요일별 할인 메뉴가 있으면 그것을 선택하는 게 이득으로 느껴지니까 선택의 고민을 덜 수 있다.(물론 정말로 득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판매전략들이 고객의 선택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한 방편이라고 본다면 단순히 상술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선택의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선택이 고통인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술과 산업이 광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앞으로 몇 곱절 많아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선택 스트레스는 점점 더 커져간다는 뜻이 되겠다.

이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시간을 끌수록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많은 심리학자들이 조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선택은 그저 새로운 경험을 여는 하나의 열쇠일 뿐이고, 우리는 쿨하게 그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연속된 선택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내일은 아무래도 아메리카노가 아닌 색다른 커피를 주문해봐야겠다.

새롭게 열릴 경험을 위해.

그리고 조금 더 흥미로운 인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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