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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Sep 05. 2020

추억으로 가는 트로트

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10)

어머니께서는 요즘 매일 트로트 방송을 시청하신다. 이 채널 저 채널 돌리면서 봤던 방송을 보고 또 보신다.


“저거 봤던 거잖아요? 봤던 거를 왜 자꾸 보세요?”

“얘, 자꾸 봐도 재밌어. 어쩜 저렇게 노래들을 잘한다니?”


그러면서 좋아하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넋 놓고 감상하시는 모습을 보면 소녀팬도 이런 소녀팬이 없다.

도대체 트로트의 무엇이 어머니를 그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것일까.


최근 트로트를 매개로 한 여러 프로그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로트라는 장르는 중장년층 이상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트로트 열풍에 남녀노소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것을 보면 세상이 또 한 번 변했구나 하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트로트가 내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국민들의 힐링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즉 트로트가 남녀노소 모두에게 안정과 위안을 주는데 일조를 했다는 얘기인데,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인간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쉬운 존재인 탓이다.


어린 시절이나 첫사랑을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가 좋았지...’라는 감상에 젖곤 한다. 하지만 이는 꼭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회초리를 맞던 일, 첫사랑과 다퉜던 일 등도 분명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회상할 때 아팠던 기억보다는 순수했던 시절의 애틋함만이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란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를 뜻한다.


므두셀라는 성경을 통틀어 가장 장수한 인물로 무려 969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할 때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좋았던 기억만 떠올리는 성향이 장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년간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이 과연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므두셀라처럼 수백 년까지는 아니지만 몇십 년 전 정도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심리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이 있다. 레트로 마케팅(Retrospective marketing)이 그것으로, 과거를 회상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십수 년 전 노래의 리메이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앞서 말한 트로트 열풍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를, 신세대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홈쇼핑 방송 음악도 레트로 마케팅과 연관이 있다. 방송 때 쓸 음악 선곡을 PD가 하긴 하지만 음악감독에게 선곡을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판매에도 도움이 되는 음악 리스트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음악들은 최신곡보다는 해당 상품의 이미지나 타깃 고객층에 맞는 음악 위주로 선별되곤 한다. 본인이 선호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무래도 채널이 멈출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판매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물론 밝은 분위기의 음악이어야 하겠지만)


그러다 보니 주 고객층 인 40-50대가 젊었을 때 즐겨 들었을법한 90년대 초중반 노래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 시절 노래가 귓가에 들려올 때면 잠깐 옛 추억에 빠지곤 한다. 주부들이 평일 오후에 라디오처럼 홈쇼핑을 틀어놓는 현상의 저변에는 음악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OO 트롯' 류의 프로그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레트로 마케팅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넘기기에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 출연자들이 정통 트로트만 고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양한 노래에 저마다의 개성을 입혀서 열창을 하고 시청자들은 그 노래 하나하나에 열광한다. 예전 감성이기는 하되, 현재의 감성으로 옛것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의 트로트 열풍 현상은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경향'을 뜻하는 '뉴트로(New-tro)'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향수(鄕愁)에 젖는 것이 일종의 퇴행 심리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고 또 맞이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생각해본다면 므두셀라처럼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잊고 좋은 기억만 가져가는 것이 삶의 요령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내일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지나간 것에 대한 아픔을 지니고 가는 것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이미 내일을 살기에 알맞게 세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면 모두 다 좋은 거예요, 이 세상은..’


30여 년 전 들었던 노래 가사 한 줄이 아직도 기억난다.


간신히 중학생이었던 그때, 울림을 줬던 가사가 아직도 마음 한 켠으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옛것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돌고 돌아 새것과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그리하여 마침내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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