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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Aug 29. 2020

같이 삽시다

홈쇼핑 심리학 에세이 (8)

분기 보고를 위한 정리 회의를 하려고 할 때였다.

약속된 시간에 회의실에 들어가니 누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회의 시작 시간을 늦춰도 괜찮겠죠...?"

"왜, 무슨 일 있나요?"

"어머, 오늘 11시에 그거 있잖아요."

"아하! 오늘이 그날이었군!"


그날은 1년에 몇 번 없는 임직원 대상 세일을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재고 소진이 주목적이다 보니 세일 폭이 클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보통 세일 시작 몇 분 전부터 많은 직원들이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노려보며 구매 준비를 하곤 한다.

이런 임직원 세일은 일종의 복리후생 측면도 있을 터, 홈쇼핑에서 근무하는 쇼핑의 달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11시 정각이 되자마자 모여있던 다른 직원들도 저마다 모바일로 제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거 싸다"

"아.. 사이즈가 없네"

"뭐야 벌써 품절이야?"

"이런 건 무조건 사는 게 득이지"


저마다 혼잣말인지 옆사람에게 주는 정보 전달인지 모를 호들갑스러운 말들을 연발하며 쇼핑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모습을 보다 보니 쇼핑 계획이 전혀 없던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쇼핑에 나만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언가 무리에 속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게 했고, 할인율이 높은 상품을 사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재고가 남아있는 상품을 뒤져가며 열심히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이 사지는 못했지만 몇 가지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무리에 동참했다는 소속감과 함께 빅세일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정도의 행위로 뿌듯함마저 느끼게 된다는 점은 쇼핑이 주는 마법이 아닐 수 없다.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심리가 소비 행위로 나타나는 현상을 '밴드웨건(bandwagon) 효과'라고 한다.


서부개척시대 금광 발견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현상처럼, 특정 상품에 대한 어떤 사람의 수요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경우를 의미한다.


홈쇼핑 방송에서 종종 쓰이는 '100만 대 판매 신화', '장안의 화제', '상품평이 무려 1,000개' 등과 같은 표현들은 모두 밴드웨건 효과를 노린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매한 제품이니 당신도 구매하면 유행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런 세일즈 전략은 제품의 장점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선택했다는 사실이 방송을 보는 고객들에게 구매를 해도 좋다는 당위성을 심어주게 되는 탓이다.


하지만 '밴드웨건 효과'의 부작용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해 전 중고등학생들이 특정 브랜드의 점퍼를 너나 할 것 없이 입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자녀가 무리에서 따돌림을 받지 않도록 결코 싸지 않았던 옷을 사줄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들의 사연을 접한 일이 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기만 친구들과 다른 브랜드의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는 청소년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심리는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근본적으로 서로를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이러한 본능이 쇼핑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발현되곤 하는데, 어느 수준을 넘어서 집단 광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음은 항상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라 전해지는 '튤립 버블'도 이런 광기와 관련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부에 대한 개인들의 과시욕에 힘입어 튤립 투기 현상이 발생했다. 희귀한 품종일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니 너도 나도 튤립 생산에 뛰어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재산적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튤립 가격은 수천 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고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실질적인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광풍은 늘 비극적인 결말을 맞기 쉽다.


물론 내가 다른 직원들을 따라 쇼핑을 한 후 자그마한 뿌듯함을 느꼈던 것처럼, 친구 따라 강남에 가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차를 타고 서부 금광까지' 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하철을 타고 친구와 강남까지'만 간다면 다시 돌아오는데 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친한 사람들과 좋은 상품을 공유하고, 그 가치를 함께 향유하는 정도면 꽤 바람직한 쇼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같이'사는 것보다 '가치'를 사는 소비 자세에 대해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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