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에 엑소 플래닛에 갇혀버리다
왜 엑소였는지, 왜 BTS나 세븐틴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서른아홉에 갑자기, 최고의 정점이 지나버린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팩폭미안 그치만 내가 엑소가 좋다고 하면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 옛날 옛적에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이발랄씨의 엑소 덕질 역시 교통사고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출산 후 산후조리원은 이발랄씨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다들 천국이라고 했다. 안 가면 손해인 그런 곳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코로나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산후조리원은 뭐랄까,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 면회는 금지되어있고 산모 역시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만날 수 없고 건네주는 물건만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매끼마다 나오는, 마치 머리카락을 빨아놓은 것 같은 (죄송) 시커먼 미역국을 계속해서 들이켜야 했다. 산모식의 특성상 간이 약하게 되어있어서 맛없는 음식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닷물 같은 오묘한 맛의 미역국이었다. (죄송)
또 다른 핑계를 대볼까? 출산 후 이발랄씨는 제대로 걷질 못했다. 평소 잘 때도 다리를 꼬고 잘 정도로 자세가 불량했던 이발랄씨. 원래부터 골반이 틀어져 있었는데, 임신하고 골반이 더 틀어지게 되면서, 출산 후에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는. 절뚝거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처음엔 지팡이로 버텨보려고 했는데, 점점 더 통증이 심해져 그것 또한 불가해졌다. 난생처음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식판을 갖다 놓고, 간신히 유축한 20ml의 모유를 배달하며 다니는 게 방 밖을 나가는 유일한 외출이 되어버리니 맨 정신일 수 있겠냐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다. 여중 여고 시절에 연예인을 좋아했던 것과 비슷한 모드였달까. 학교 집 학교 집 하면서 공부에만 매진했어야 했던 시기였지만, 공부는 이발랄씨의 맘대로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연애&연예인 덕질이었다. DNA에 각인되어있던 그 행복한 경험은, 산후조리원의 이발랄씨를 엑소 앞에 데려다 놓았던 것이다. 21세기는 덕질하기 얼마나 편한 시대인가, 오빠들 나온 브로마이드나 잡지를 사서 볼 필요 없이, 유튜브에만 들어가면 유튜브 알고리즘이 사랑스러운 엑소짤을 이발랄씨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었으니 말이다. 간이 되어있지 않은 밍밍한 밥을 먹어야 하는 이발랄씨에게 엑소의 짤은 정말 소중한 양념이 되어주었다. 소금과도 같은 엑소였던 것이다. 몇년 전부터 이미 거기 있었던 'sabor a mi' 영상을 보며 이발랄씨는 참으로 행복하게 웃었다. 그 결과 산후조리원에서 이발랄씨의 유튜브는 육아와 엑소라는 매우 언밸런스한 조합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산후조리원을 나오고 나서는, 그만 좋아하게 될 줄 알았다고 한다. 육아가 빡세다보니 그럴 시간이 없을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피곤한 밤, 자기전에 보는 엑소의 영상은 이발랄씨를 여전히 웃게 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말처럼- 이발랄씨는 엑소를 알게 되면서 점점 더 좋아지게 되었다. 처음엔 백현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엔빌리지가 좋아지자마자 그는 슬프게도 곧 군대를 가버렸다. 그 자리를 경수가, 카이가, 세훈이... (여기까지만 쓴다) 대신하면서, 이발랄씨는 엑소 유니버스에 구속되어버렸다. 모든 멤버를 다 좋아하게 되면 이 유니버스를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더욱 갇히게 될 것인가, 이는 어려운 문제이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같이 연예인을 좋아했었는데, 이제 이발랄씨 주변엔 그런 친구들이 없다. (다 나이를 먹었으니 철이 들었겠지) 그러니 이발랄씨가 엑소 덕질을 하는 것은 주로 혼자 있을 때이다. 혼자 산책을 할 때, 엑소의 템포를 듣는다. MV 2억 뷰를 돌파하는데 이발랄씨의 클릭수도 물방울만큼 기여했다. 뿌듯하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도 듣는다. (지금도 엑소 콘서트 실황 듣고 있는 건 안 비밀) 아 그러고 보니, 이발랄씨의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역시 육아 중인)는 아미이다. 밤 8시 50분에 연락을 하자 곧 시작할 달려라 방탄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둘 다 늠름한 직장인이자, 믿음직한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바람직한 현대인이지만, 항상 어른스러울 수는 없고, 이렇게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다.
엑소 콘서트 실황을 들으며, 이발랄씨는 아주 쓸데없는 상상을 한다. 코로나 이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혼자라도 콘서트에 가서 공연을 보고 싶다. 엑소가 이발랄씨를 엑소엘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덕질의 실용적인 장점은 별로 없다. 서른아홉에 엑소까지 좋아하게 되었으니, 아가가 컸을 때 아가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같이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럼 쿨한 엄마가 될까? 아니면 주책이라 부끄러운 엄마가 될까? 메타버스 시대에서 자랄 아가는 AI 연예인을 좋아하게 될까, 그럼 엄마 때에는 아담이라는 가수가 있었다고 알려주게 될까.
길게 그럴듯하게 쓰려고 애썼지만, 결론은 그런 거다.
이발랄씨는 덕질 중이고, 행복하다.
엑소 응원한다.
코로나 끝나면 공연 보러 가고 싶다.
괜찮아도 괜찮아.
I'm fine.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