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잔고가 천만원에서 170만원이 되었을 때의 아찔함
이발랄씨는 요즘 돈이 떨어지고 있다.
돈은 상대적인 것이고,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을 너무 가난해서 비참하다, 또는 돈이 없어서 죽겠다 라고 과장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발랄씨에게 돈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육아휴직을 시작하며 1000만원이 담겨있던 통장은, 복직을 5개월 남짓 남겨둔 지금은, 170만원으로 줄었다. 돈은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악착같이 모아본 적이 없는 이발랄씨였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이 마흔에 처음으로 맘마미아 가계부를 구입했다.
#. 처음에는 아이패드가 갖고 싶었다
평소에 공책, 노트, 타블렛을 좋아하는 이발랄씨의 눈에 연말부터 아이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프로와 에어, 미니의 차이를 습득하며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애플펜슬을 손가락에 쥐자, 그동안 육아로 인해 지쳐있던 손목 터널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뭐든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뽕맞은 기분을 얼마만에 느껴보는지. 하지만 어떤 아이패드를 사든 도합 100만원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이발랄씨가 일을 하는 중이었다면 할부로든 일시불로든 구매했겠지만, 지금은 갑작스런 소비를 감당할 깜냥은 없었다. 이발랄씨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신이난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채워 잡아매 온순하게 만든 뒤 가게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남편 이자상씨는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리고 육아휴직 기간 중에 이발랄씨에게 꼭 아이패드를 사주꾸마 하고 마음을 먹었다. 때마침, 가계부 첫 장에는 팍팍한 현실 너머의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라는 듯, 버킷 리스트를 적는 장이 있었다. 이자상씨는 첫번째 목표에- 이발랄씨 아이패드 사주기, 라고 적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 건조기였다
영유아검진을 다녀온 이발랄씨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바로 아가가 고양이 알레르기 2단계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고양이 두 마리의 충실한 집사이자, 한 아가의 현명한 엄마로서, 이발랄씨는 폭풍검색을 한 끝에 건조기가 고양이 털날림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뜩이나 양가 부모님들이 고양이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는 이 마당에 아가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장에... 이발랄씨는 검사용지를 북북 찢어버린 뒤, 고양이와의 격리(와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아가와 친정으로 향했다. 그 사이 이자상씨는 생이별의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고양이의 할큄으로 인해 피를 철철 흘리며 두 마리를 간신히 목욕시켰다. 고양이와의 공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했다. 이발랄씨는 가계부의 첫장에 쓴 '이발랄씨에게 아이패드 사주기'를 지우고, '이발랄씨에게 아이패드 건조기 사주기'로 고쳐썼다. 그리고 두 사람은 100만원짜리 건조기를 구매했다. 일시불로. 이발랄씨는 할부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 미래의 나에게 행복을 빼앗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나에게 짐을 지우지 말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까진 문제없이 굴러온 것 같은데, 요즘의 이발랄씨는 나를 위한, 아가를 위한, 고양이를 위한 삼중 소비 아래 헉헉대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필라테스를 60만원에 긁었다. 모든 소비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고, 여기엔 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발랄씨는 출산 이후 걷는 걸음걸이가 꽤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몸무게가 13kg가까이 늘었던 출산 이후 몸이 어긋나는 바람에, 자세 교정을 하기 위한 운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아가 돌잔치 준비로 40만원을 예약비로 더 쓰게 되자, 다시 한번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이 아찔함은 가계부에 숫자를 적을 때 다시 한번 생생하게 상기되고, 가계부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는데 그건 바로-
#. 돈을 쓰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주 내내 이발랄씨는 소비와 식욕을 억제하며 친정에 꼭 붙어있다가 4일만에 나온 이발랄씨는 동네의 서점에 들렀다. 이발랄씨가 대학교 때부터 다니던 서점이었다. 그녀가 굳이 인터넷으로 사지않고 동네 서점에 간 이유는, 그녀가 쓰지 않은 포인트가 5000점이나 있다는 사실을 지난번 방문에서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점에 들러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도서관에는 없고, 정말로 읽을 책이어야 했다. 책을 사서 읽지 않고 꽂아만 두는 일은 예전의 이발랄씨에게는 흐뭇하고 아름다운 일상이었지만, 이제는 없애야 할 사회악이었다. (정말일까? 쓰다보니 슬프네ㅠ) 마침내 책을 골라 계산대 앞에 섰다. 생명의 삶 2월호와, 나일강의 죽음이었다. 한 권은 이발랄씨의 한달간의 영적 양식이었고, 나일강의 죽음은 이후 즐거운 영화 관람을 위한 합당한 소비였다. 하지만 이발랄씨의 대학시절보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숱이 적어진 주인은 포인트를 쓰는 것을 영 마땅치 않는 것 같았다. 지난번 방문에 포인트로 결제해달라고 했더니, 이미 계산이 되었다고 싫은 내색을 했기 때문이다. 작은 서점으로서 이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남는 것은 얼마나 고된... 됐고, 이건 소비자의 권리이다. 이번엔 반드시 포인트를 써야했다. 마음을 굳게 먹은 이발랄씨는 볼드를 넣어 강조해서 말했다.
"포인트로 해주세요."
주인의 아내는 도서 재고를 체크하느라 바쁜(정말 바빴을까. 날 기억하고 있는 눈빛. 이번에 저 여자는 분명히 포인트를 쓰겄구만) 남편을 대신에 선선히 계산을 진행했다. 휴, 끝났네. 생각보다 쉬웠어. 그러나 핸드폰에 뜬 결제 문자를 본 이발랄씨의 입가가 굳어갔다. 아니야, 이건 잘못되었어.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았잖아. 이발랄씨는 말했다. 이번엔 더 커진 폰트에 굵은 명조체였다.
주인의 아내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결제를 취소한 뒤 포인트를 써서, 다시 결제를 진행했다. 실수는 주인의 아내가 한 것인데, 이발랄씨는 왠지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취소, 재결제를 한 뒤 쓸데도 없는 영수증을 챙겨 서점 문을 열고 나오는 이발랄씨의 가슴에 찬 공기가 들어왔다. 상쾌했다. 차가운 공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왠지 한동안 서점에 미안해서 못갈 것 같은 허전함이 가득 채워졌다. 그래도 이발랄씨는 모처럼의 자유시간을 즐기기 위해 스타벅스에 들어와 브런치를 쓰고 있다. 4일만의 외출이었고, 그렇기에 커피 한잔 정도는 합당한 소비였다. 하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값이 4500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아찔함이 찾아왔다. 신용카드의 끝이 유독 날카롭게 느껴지는 1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