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발랄 Jun 25. 2021

수수께끼 - 이발랄씨가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것은

힌트 -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유 수유할 때 남들은 뭘 할까? 한쪽 젖에 15분씩이다. 이발랄씨는 한쪽 젖을 다 물리고 다른 쪽 젖을 물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보통 아가 몰래 핸드폰을 하는데 (헤헷),  아까는 수유를 하다가 꽤 발랄한 수수께끼 하나가 떠올라서 배시시 웃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뭘까? 재밌는 수수께끼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맞힐 사람은 없다. 남편은 출근했고, 이발랄씨 옆에는 아직 옹알이밖에 할 수 없는 아가만 있으니 답을 그냥 공개하자면, 그건 바로 ‘바깥공기’이다. 육아를 시작하고 바깥공기에 무척 집착하게 되었다. 집에 있다 보면 오후 4시쯤 되면 머리가 몽롱해진다. 해가 떨어진 밤이라도 아가를 재우고 시간이 나면 바깥을 정처 없이 걷는다. 너무 어두워지만 동네 야외 헬스장에서 구름다리라도 미친 듯이 걷는다. 운동이 목적이라면 집에서 홈트라는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발랄씨에게 필요한 건 바깥공기이다. 코까지 끌어올린 마스크 사이로 스며드는 매연과 소음, 그리고 6월의 풀냄새가 섞인 바깥공기.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그녀의 것이 아니고, 바깥공기를 마실 수 없을 때의 대용품은 바로, 카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이다.


*             *             *


한 주간 기저귀를 갈고, 아가를 재우고 하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해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3개월의 출산휴가 기간 동안 이발랄씨(aka.나)가 온전히 혼자 아가를 돌본 것은 한 달 반 정도인데, 짧담 짧고 길담 긴 그 시간 나를 버티게 해 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이다. 밤부터 새벽까지 수유를 2, 3차례 하고 나면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그럴 때  찬물에 카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털어놓고 가루가 채 녹지 않은 한잔을 급하게 음미하며(?) 마시면 정말 세상 행복해진다. 온몸에 잠시 후퇴해있었던 도시적인 감각이 되살아난다. 마치 머리가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오늘 하루도 이 기분이라면 아주 똑똑하게 살아낼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아주 똑똑함은 사실 별로 필요하지 않다. 육아에 버틸 수 있는 건강한 체력과 멘탈이 시급할 뿐.)


이발랄씨가 아메리카노에 원래 미쳐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은 지겨운 일상 중에 하나였다. 이어지는 회의 때마다 무리 중 가장 어리거나 배려심 좋은 누군가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준비한다. 분위기가 너무 드세지거나, 어색해지거나 할 때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무마하기 좋은 툴이었다. 하지만 그런 회의가 많아지면  하루에 3잔도 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할당받을 때도 있었다.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주는 족족 받아먹다 보면, 배에 스트레스가 동반된 가스가 잔뜩 차서 과민한 대장을 갖게 되거나, 신경이 무척 예민해져서 밤이 되어도 이런저런 업무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 불면증을 안고 새벽 4시쯤에나 잠에 들곤 했다. 음료 중에 커피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세상엔 의외로 마실게 별로 없다. 단 음료라면 싫은 그런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한 녀석은 없었다. 배가 부르지 않고, 살이 찌지 않고,  머리를 맑게 해 주고, 가성비도 좋다. 그렇지만 회사를 탈출하고 싶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싫어질수록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싫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잔씩은 마시게 되는 지독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마셔야 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임신 중에는 자제해야 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되었다. 그러면서 미움도 사그라든 걸까?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디카페인으로라도 하루에 한잔씩 악착같이 마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음료가 되어버렸다. 한 끼를 굶는 것과 커피 한잔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한끼를 굶는 것을 택할 용의가 있을 정도로 나는 아메리카노에 중독되어버렸다.


하루 종일 샤워할 틈 없이 모유 냄새가 배어있는 수유복을 입고, 청소와 빨래와, 그 외에 열나게 해도 티 나지 않는 집안일, 아가 돌보기 등을 하다 보면 인간 이발랄은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회사 생활을 할 때에 했던 생각들, 이발랄의 미래에 대한 고민들은 집안에 있다 보면 뿌예지고, 그냥 아가와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고 대단한 아가 엄마만 남아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럴 때 커피를 마시면, 예전의 발랄했던 나를 한조각 소환해 낼 수 있다. 바깥공기 결핍으로 몽롱해지는 지금의 나를 다시 붙잡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꽤 불행했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어 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꼭 회사를 다녀야 하는가? 월급이 내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그냥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좋아지지 않을까? 같은 몽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갔던 과거의 나를 조심스럽게 감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육아휴직을 내기 전에 팀장님과 면담을 했었다. 그도 이발랄도, 마치 1년 뒤에 돌아오는 것이 정해진 미래인 것처럼 얘기했었다. 그때 난 속으로 다른 길이 열리길 바랐다.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아가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을 감당할 수 있겠나? 소비 중독자인 이발랄씨, 사고 싶은 것을 안 사도 행복할 수 있겠나? 욕구를 다이어트할 수 있겠나? 그렇지 않다면 돌아가서 행복해질 수 있겠나? (팀장: (속으로) 일년 뒤에 이발랄씨 자리가 남아 있으려나? / 이발랄: (헉)) 다 녹지 않은 아메리카노 가루의 찌꺼기가 보일 때쯤이면 이런 생각들이 피어오른다. 열탕에 있을 때 냉탕이 그립고, 냉탕에 있을 때 열탕이 그리운 그런 핑퐁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데, 과연 1년 동안 좋은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어쨌든 1년의 시간과, 하루하루 갈아야 할 열 개가 넘는 기저귀가  있는 이발랄씨에겐, 카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잔은 이런 고민들처럼 사치이고, 사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랄한 여자의 일생, 여자의 가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