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의 초입에 서서, 월급에 대해서 고찰하다
월급날 아침 8시가 넘어서자, 이발랄씨는 눈을 비비며 평소처럼 계좌를 확인했다. 밤사이 썰물과 밀물처럼, 월급날에 맞춰놓은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신선한 월급이 수혈이 되어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왠열, 카드값은 약속대로 빠져나갔지만 물 때에 맞춰서 들어와야 할 월급은 들어오지 않았다. 잔고가 0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낯설고 신선한 숫자, 0. 흥청망청 살던 20대 이후로 처음 보는 숫자. 이발랄씨는 오싹함과 함께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뭐지? 순간 회사 인사팀에 전화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당연히 그들이 잘못했을 확률보다, 그녀가 잘못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메일함을 뒤져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조항을 매의 눈으로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찾아냈다.
육아휴직 한 달 후 매달 급여를 지급… 육아휴직 한 달 후 매달 급여를 지급… 그랬다. 늘 그랬듯이, 이발랄씨는 윗사람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관공서에 보낸 통지 같은 걸 제대로 안 읽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육아휴직하는 남들은 다 알았겠지만 그녀는 몰랐던, 출산 휴가에서 육아휴직으로 넘어가는 한달은 통장에 돈이 꽂히지 않는 달이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녀 머리 속에선 인디언들이 떠올랐다.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들은 옛날에 달 이름을, 6월, 7월 이렇게 부르지 않고, 나뭇잎이 짙어지는 달,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 이렇게 낭만적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그녀에게 월급이 나오지 않는 달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막처럼 건조한 달, 말없이 계좌 잔고를 바라보게 되는 달, 곳간에 쌀이 마르는 달일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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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란 무엇일까. 사회초년생, 술 약속도 많고, 사고 싶은 옷도 많고, 친구들도 많았던 발랄했던 그때에 월급은 이발랄씨(aka.나)에게 차가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훈풍 같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연애라도 할라치면 돈이 왜 그렇게 많이 드는 걸까. 억만장자는 아니지만 천성이 남에게 얻어먹는 것을 불편해하는 성격이라, 남자 친구를 만나더라도 거의 더치페이를 하다 보니 늘 쪼들렸다. (하지만 행복했다. 하하.) 한 번은 카드값이 월급을 초과해버린 탓에 카드사에서 독촉 전화도 온 적이 있다. (누구나 있는 경험인 거겠지?) 독촉 전화는 무서워서 차마 받지 못했고, 대신 독촉 전화보다 조금 덜 무서운 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돈은 빌려주었지만 그만큼의 잔소리를 귀에 피가 나올 정도로 들은 뒤, 나는 아 돈은 남에게 빌리면 안 되는 거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마워 언니!) 그 이후로 월급에 꽉 차게 소비를 하는 아주 계획적인(?) 인간이 되었다.
30대가 되어서 결혼도 하고, 직장생활을 십 년 정도 하자 절대 오를 것 같지 않았던 월급도 어느덧 앞자리가 바뀌어있었다. 게다가 옛날만큼 사고 싶은 것도 없어져서, 갖고 싶은 것을 사도 그렇게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소비행위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행위였고, 그렇게 내 안의 불만족스러운 녀석을 소비로 달래 가며 직장생활을 했던 건 맞다. 하지만 내 안의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패드를 산다고 해서, 내가 그림을 열라리 잘 그리지 않을 것이란 것을. 멋진 노트를 산다고 해서 조앤 롤링이 박수를 보낼만한 글이 쭉쭉 나오진 않을 것이란 걸. 몇 번의 큰 소비는 내 삶에 자극을 주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그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회사에 여덟 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 하는 직장인이었고, 그런 소비 또한 그냥 나에겐 직장생활을 연명할만한 에너지를 주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월급은 나에게 행복을 주는가? 나에겐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가? 그건 톨스토이가 물었던 질문과 비슷하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을 보면 악마가 어떤 사람에게 제안을 한다. 하루 동안 밟은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말이다. 무작정 앞으로만 나가면 될 것 같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직선이 아니라 어떤 도형 형태의 땅을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 말은 어느 시점에서는 분수를 알고 컴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여기서부터 스포)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고 운동부족이었는지 탈수증이었는지, 돌아오긴 돌아오는데 돌아오자마자, 지쳐서 죽어버린다. (슬픈 이야기이다) 그가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을 묻을, 고작 그의 키만큼의 땅이었다.
직장 생활과 사회생활에 지칠 때 나는 비뚤어져서 그 동화를 떠올리곤 했다. 난 지금 행복한가, 왜 자꾸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는 건가. 회사생활은 어느 정도 뻔한 부분이 있다. 팀원에서 승진을 하면 팀장이 되었다가 그다음에 오래 살아남고 운이 굉장히 좋고 정치에 소질이 있다면 (난 없지만) 아마도 임원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 회사와의 인연이 끝나면 아마 그만두게 될 것이다. 난 회사 다닐 때 팀장부터가 되기 싫었다. (누가 시켜준다고 하지 않았음에도) 싫은 걸 잘 참는 게 어른이라지만… 막상 닥치면 하게 되는 일이라지만 멀미나는 헬리콥터를 탄 대원처럼 늘 탈출 버튼을 만지작 거리며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의 선택으로 회사를 잠시 떠나, 출산휴가를 내고, 육아휴직의 초입에 서 있다. 계산 실수로 예상보다 빨리 가난해진 채로, 먼지밖에 없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남은 12개월을 바라본다. 남편이 나에게 생활비를 줄 것이지만, 회사 다닐 때처럼 재미로 날 위해서 즐거워서 돈을 쓸 일은 줄여야 한다. (안녕 배달의 민족, 안녕 예스이십사, 안녕 스타일난다, 마켓컬리 모두 안녕, 안녕~)
그렇게 살면 내 삶의 발랄함이 줄어들게 될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끝없이 질문을 던졌던 나에게 이제 답을 할 시간이 온 건 맞다. 월급이 널 행복하게 하니? 차라리 조금 덜 받고 네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해보는 건 어때? 나에게 남은 육아휴직의 시간이 그런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간과하면 안 되겠지, 이건 그냥 휴직이 아니라 육아휴직이라는 걸. 내 자아 따윈 중요하지 않고 아가가 끙아를 성공했냐, 하지 못했냐에 따라 기분이 맑았다가 흐렸다가 하는 것이 육아인 것이다. 그래도 육아를 해내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걸 발견하고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거, 철없는 욕심은 아닌 거겠지? 만약 누군가 근엄하게 그거 철없는 욕심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발랄씨는 그 사람 뒤통수를 씨게 때리고 도망갈 거다. (두다다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