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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발랄 Jun 30. 2021

도비, 아니 이발랄씨는 수요일 오후엔 자유예요.

일주일의 중심에서 육아 프리덤을 외치다


작은아씨들,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알프스 소녀 하이디, 소공녀…. 아가가 잠든 밤 9시, 이발랄씨는 몽롱한 눈으로 열탕 소독을 준비하며 문득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소설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서재방 책꽂이에 소설들은 꽂혀있지만, 세상에 대해 배워가는 0세 아가와 하루를 보내는 그녀에게 이런 소설들은 아스라이 멀리 있다. 종이책은 집중이 잘된다. 그렇기에, 아가가 손톱으로 얼굴에 생채기를 내진 않는지 집중해야 하는 이발랄씨에게는 부적합하다. 그렇다고 핸드폰으로 e북을 보기에도 좀 그렇다. 전문가들은 만 2세까지 아가에게는 핸드폰을 보여주지 말라고 하는데, 그건 아가의 정서 발달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는 이제 말하는 법을 배워가야 하는 시기인데,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들은 말을 배우는 것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웬만하면 핸드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면서 깔깔대고 있는 모습도 안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발랄씨가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아가가 잠든 이후인데, (바로 지금) 그녀는 이제 막 수유등 불빛만 빛나는 어두운 동굴 속에 아가를 재우고 막 빠져나온 후로, 눈이 매우 침침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졸음이 쏟아질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느낌은 회사원 시절과 평행우주처럼 비슷하다. 퇴근하기 전에는 저녁의 삶에 대해서 이런저런 기대를 하지만, 막상 집에 오면 방바닥과 평행이 된 상태로 하루를 마감했던 시절들.


* * *


졸리다. 하지만 지금 자기는 억울하다. 그래서 잠을 깨울 수 있는 일을 도모한다. 키보드를 두들기며 ‘수요일’에 대해 쓰기로 했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제루샤 에봇은 수요일을 싫어한다. 고아원을 후원하는 부자들이 와서 내 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거들먹거리며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고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제루샤는 고아원의 고아들을 최대한 빈틈없이 완벽하게 보이게 해야 한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싶다. 말 안 듣는 꼬맹이들을 씻기고, 머리도 빗기고, 코도 킁 하고 풀어주고… 게다가 그 모든 일들을 해야 하는 이유가 제루샤 에봇이 (아무도 데려가지 않아서) 가장 나이가 많아져버린 고아이기 때문이라면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짜증 나는 수요일이, 제루샤 에봇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데, 바로 제루샤가 그 수요일이 얼마나 거지 같은 지에 대해 쓴 발랄한 작문이 존 스미스라는 이름의 후원자의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 스미스는 제루샤 에봇의 재능을 높이 사서, 대학을 보내는 것까지 후원하게 된다.


내일은 수요일이다. 제루샤 에봇이라면 질색을 했겠지만, 나에게 수요일 오후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다. 시어머니가 아가를 봐주시러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뭐든지 뚝딱뚝딱해주던 마음씨 착한 요정 할머니 같았던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떠나가던 주, 육아 홀로서기를 시작하던 때에 고심 끝에 정한 규칙이다. ‘이발랄씨는 수요일 오후에는 자유입니다.’ 그렇게 하기로 한 첫 주엔 시어머니가 오신 뒤에 한참을 쭈뼛쭈뼛하며 있다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연신 외치면서 집을 나섰다.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 또 혼자 집을 떠나서 시간을 보낸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색했기 때문이다. 잠시 집 주변을 서성이며 뭘 할까 고민하다가 먼저 미용실에 갔다. 출산 전부터 길러서 부스스해진 머리를 잘랐다. 머리가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느낌이 시원해서 좋았다. 그다음에는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집에서 못 먹는 거… 집에서 못 먹는 거… 고민하다가 골라서 먹은 음식이 바로 냉면이었다. 면을 삶다가 아가가 울면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러면 괜히 서러울 것 같아서 피하던 음식이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조용한 냉면집에서, 허겁지겁 퍼먹지 않고, 고명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먹었다. 행복했다. 냉면 한 그릇을 뚝딱하고 깨달았다.


좋을 줄 알았지만, 정말 너무 좋다!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이 내 속으로 내려가자, 개비스콘 광고의 아저씨처럼,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안 먹었어도 냉면 맛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안심이 되었다.


육아를 하면서 힘든 순간들이 있다. 난 아가한테 웃음을 억지로 지을 때가 그랬다. 아무리 달래도 우는 아가 앞에서 지쳐서도 억지로 웃음을 지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목이 메는 데도, 저는 괜찮아요, 국장님 하면서 억지로 웃을 때의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상처가 되었었다. 그렇게 까지 참았어야 했나? 싶었다. 아가한테까지 그렇게 억지로 하고 싶진 않았다. 아가한테 내 억지웃음을 들킬 것 같기도 했고, 아가는 부모한테 배운다는데, 아가가 힘든데도 억지로 웃는 아이가 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가한테는 진심으로 웃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가와 있을 때 기분이 좋고 싶다. 내 좋은 기분을 아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세상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기운이 없을 때에는 억지로 웃지 않기로 했다. 아가에게 잠시 등을 돌리고 쉬고 있거나, 엄마가 조금 힘들어, 그래도 아가 사랑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웃기 위해선, 나에게 ‘혼자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서른아홉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수요일 오후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동굴로 나설 때에는 지금 여기 들어가도 괜찮나 싶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 그 동굴의 어두운 입구로 들어가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빛이 나오고, 또 다른 세상이 나온다. 나만 혼자 아는 비밀 장소이다. 아름다운 풀밭과 누워서 책을 보기 좋은 해먹과 맛있는 냉면집이 있다. 해먹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잠시 파란 하늘에 넋을 잃고, 살짝 낮잠이 들면 어느덧 수요일 오후가 끝나 있겠지. 그렇게 충전완료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서, 아가를 향해 웃어야지. 보고싶었어!


자, 내일을 기다리며, 이제 유축기 열탕 소독을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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