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임부 팬티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아가가 잠이 든 밤, 하루 동안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이발랄씨. 베란다에 있는 빨래건조대에 나가서 입을 속옷을 찾는다. 습관처럼 거대한 빤쭈를 집으려다가, 잠시 망설이는데… 이제 출산한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거대한 임산부 팬티(=할머니 빤쭈)를 입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이발랄씨에게, 낡은 할머니 빤쭈가 말을 걸었다. “저기 처자… 뭘 고민해. 빤쭈는 편한 게 장땡이여. 세상에 나처럼 편한 빤쭈가 있간디? 입으랑께. 그리고 꿀잠을 자는 거여…” 아, 넘나 편안한 이 할머니의 푸근한 말투에 이발랄씨의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렇게 이발랄씨는 할머니 빤쭈와의 이별을 또다시 내일로 미루기로 한다. 빤쭈를 집고 거실로 오면서 생각한다. 그래요, 우리 내일 헤어져요, 할머니. 그랴, 잘혔어. 잘한겨.
(…)
과연 내일은 할머니 빤쭈와의 이별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게 무슨 아스트랄하면서도 로맨틱한 요상한 상황인가 싶지만, 난 언제쯤 할머니 빤쭈와 이별할지에 대해서 꽤 오래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임신을 하고 많이 산 아이템 중에 하나가 바로 속옷이고, 최종적으로 정착한 것이 이 할머니 빤쭈였다. 임신 후 내 몸무게 앞자리는 2번 바뀌었는데, 최고 기록은 출산 당일날 찍었던 73.9kg였다. 남편한테는 쪽팔려서 72kg라고 했다. 73.9보다 72가 덜 쪽팔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땐 그랬나 보다. 몸이 무거워지고. 턱이 두 개가 되고, 골반과 배가 거대해지기 시작하자, 기존에 입던 속옷들은 벌칙처럼 느껴졌다. 입고 나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속옷을 사야 했다. 임부 팬티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꼭 무식하게 큰 것만 있는 건 아니어서, 적당히 커 보이는 팬티를 찾았다. 난 할머니 빤쭈는 사 입기 싫었다. 남들은 그렇게 안부를 거라, 할머니 빤쭈를 내 나름대로 정의해보자면… 엉덩이와 배를 덮는 큰 팬티이다. 난 속옷은 그래도 예뻐야 한다고 생각했다. 뭔가 주렁주렁 화려한 그런 게 아니고, 아무튼 내가 봤을 때 할머니 빤쭈는 저엉말 아니었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임부 팬티를 몇 번 시도했다. 그렇게 크지 않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팬티스러운 팬티로. 하지만 막상 입고 지내다 보니 불편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속는 셈 치고 할머니 빤쭈를 주문했다. 그리고 입었는데… 이건, 이 세상 편안함이 아니었다. 마치 입는 순간 속옷을 안 입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큰 빤쭈를 입었는데 이건 굉장한 아이러니), 원숭이들이 노니는 뜨끈한 노천 온천에 들어와 있는 편안함 같기도 했다. 티팬티를 입었을 때의 느낌이 마치 샤넬 No.5만 입었을 때 느끼는, 막상 안 편하고 약간 추운 오싹함이라면, 할머니 빤쭈는 뭔가 서울에서 고생하다가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마중 나온 할머니 품에 안기는 편안함이었다.
그렇게 할머니 빤쭈와 나는 출산 때까지 행복하게 잘 지냈다. 하지만 여전히 미학적으로는 좋아지지 않았다. 가끔 빨래를 갤 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렇게 큰 팬티가 나한테 맞는다고? 이건 거의 수건 사이즈인데? 내 얼굴보다 큰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때 빨래를 안 해서 할머니 빤쭈가 떨어질까 봐 걱정하기도 했다. 산후조리원에 들어갈 때에도 날짜를 계산해서 할머니 빤쭈를 개수를 맞춰서 준비하려고 했으니까. (더 사기는 싫었으니까.) 그리고 할머니 빤쭈는 꽤나 튼튼해서, 부끄러워하면서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나의 모순적인 태도를 잘 견뎌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출산 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몸무게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73.9kg의 고점을 찍은 몸무게는 조리원에서 9kg가량 빠진 이후로는 지지부진했다. 64.5, 63.9, 62.5, 63, 61.0… 꽤 오랫동안 그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몸무게의 앞자리가 며칠 전 5로 바뀌었다. 아… 그때의 감격은 어렵사리 승진했을 때의 감동과 비슷했다. 너무 기뻐서 체중계 숫자를 찍어놓으려고 핸드폰을 드는 순간 다시 앞자리는 6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이건 꽤나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숫자 5인가요, 옷장에서 몇 년째 자고 있는 멋쟁이 청바지들도 이제 곧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멋쟁이 청바지 안에 할머니 빤쭈를 입으면 속옷이 위로 잔뜩 삐져나올 텐데, 그건 안될 말이지, 안될 말이야. 고개를 저었다. 이제 할머니 빤쭈를 정말 벗어버려야겠다. 그런데 마음이 이상하게 시원섭섭했다. 할머니 빤쭈와 정이라도 든 걸까?
나만 그런가? 할머니 빤쭈는 수치풀한 느낌이 있다. 오래전 영화라 어렴풋하지만, 브리짓 존스에서 여주가 남주와 갑작스럽게 잠자리를 갖게 되는데, 남주가 이건 빤쭈인가, 수건인가 하고 물어봤던 장면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누군가 속옷 브랜드를 묻는다면 빅토리아 시크릿이라고 두 눈을 똑바로 보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할머니 빤쭈가 좋다고, 난 할머니 빤쭈가 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발랄씨는 못난 속물인 것이다...
모르겠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왜 나란 인간은 이렇게 생겨먹어서, 좀 더 고상한 주제가 아니라, 할머니 빤쭈 따위에 대해서 쓰고 있는 것일까.(젠장) 그리고 할머니 빤쭈와는 언제쯤 헤어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헤어지고 싶기나 한 걸까. 임신 전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하고 당연하고, 바람직한 욕망과, 막상 할머니 빤쭈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버린 지금의 나… 할머니 빤쭈와의 이별을 유예하는 건… 현실에 안주하는 행위인 걸까? 아, 이건 생각보다 꽤나 지지부진한 이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