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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발랄 Jul 13. 2021

엄마가 되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 #01

서울대병원을 기억하다

***


난 내 인생이 명랑만화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외모로는 순정만화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왕이면  유쾌하고 재밌게 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내 필명 '이발랄'을 만들어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하려고 하는 얘기는 전혀 발랄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치 본 시즌 밖의 이야기처럼,  앞서 썼던 몇 편의 글과는 다른 결의 어두운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이유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종이 같은, 그 힘들었던 경험을 작게 접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접어 가다 보면 어떤 모양이 만들어질 것 같고, 내가 접어가는 그 모양으로 그때의 경험을 기억하고 싶다.


***


2018년 1월, 남들은 새해의 설레는 기분에 젖어있을 그때에 이발랄씨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누워있었다. 뱃속에서 16주 되었던 아가는 유산 판정을 받았다. 무척 조용한 유산이었다. 하혈이나, 통증도 없었다. 정기검진을 하러 간 병원에서, 쿵쿵 쿵쿵 들려야 했던 아기의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심장이 조여 오는 며칠의 시간을 보낸 뒤 찾아간 병원에서는 최종적으로 유산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나는 수술을 진행하기 위해 큰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책도 읽을 수 없었고, 일기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단지 그 시간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면 마치 원래의 그림이 있었던 캔버스에, 까만 물감을 덧칠해 놓은 느낌이다. 물리적으로는 마취하고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했던 시간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안 좋은 일은 잊어버리려고 하는 편이라, 중간중간 힘든 순간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간 자체가 어둡고 힘들었기 때문도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언젠가는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지만, 이제 내 주변에 그 일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두서없이 얘기해 누군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다. 보통 난임이라고 정의되는 그 터널 같은 시간을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그리고 그 어두운 시간 가운데에도 행복한 일들이 많았다는 걸 잊지 않고 싶다. 어두운 밤일수록 길을 비추는 달빛이 더욱 소중한 것처럼.


사실, 서울대 병원에서의 시간 중 쓸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뿐이다. 하나는 새벽에 수술을 하기 위해 병실에서 수술실로 가던 기억이다. 까만색 물감이 가장 진하게 칠해져 있는 구간이다. 새벽 1시쯤 뱃속이 우르르하더니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그건 이제 수술을 시작할 수 있다는 신호였고, 나는 휠체어에 탄 채, 어두운 복도를 지나서 수술실로 갔다. 남편은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랬겠지만, 복도는 정말 유독 추웠다. 뼈가 시리고,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두려웠다. 죽음처럼 어둡고 음습했다.


또 다른 기억은 레지던트 선생님이 눈물을 닦아주던 기억이다. 얼굴이 하얗고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누워서 질정을 넣고 내가 눈물을 흘리자, 왜 울어요, 하면서 옆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고마웠다. 사실 병원에서 그리고 한참 뒤에도, 나는 마치 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스펀지처럼, 누군가가 말을 걸거나 손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수가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내가 수술을 하고 나와서 남편이 얘기해준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병원에서 알려준 절차에 따라, 이미 영혼이 떠난 아기는 화장을 시킨다. 내가 병실에서 회복하고 있는 동안, 남편은 병원에서 준 상자에 담긴 아가를 품에 안고, 화장을 하러 갔다. 돌아온 남편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남편에게 어땠냐고 물어보았을 때, 남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미 가장 힘든 일을 겪고 난 후라,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보다 가벼웠어"라고만 했다. 남편이 얘기해줘서 기억을 하는지, 아니면 내 상상인지 모르지만, 남편이 가벼운 상자를 품에 안고, 차창 밖 추운 겨울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 이미지가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거대하고 비극적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 남은 사람은 뭔가를 깨닫게 된다.


우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이것은 ‘자연의 선택’이라고. 세상에 나오기에 너무나 연약한 아기였기 때문에, 나왔을 때 아기가 더 힘들 것이기에, 자연이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마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맥락으로 얘기한 것이리라. 자연의 선택이라는 말은 꽤 오랫동안 서늘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마치 갑자기 내게 다가와 충돌하고 지나가는 거대한 빙하를 바라보는 것처럼, 빙하에게 엿 먹어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사실 나는 무력하게 침묵했다.


아직도 왜 그때 그런 일이 내게 생겼는지는 나는 모른다. 처음에는, 그리고 꽤 오랫동안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을 했다. 아마 다시는 같은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치 데스노트를 쓰듯이 가까운 몇 주간 나를 업무적으로 괴롭혔던 사람들, 내가 무리했거나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들을 생각해 내려고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잘못했던 일들도 떠올려봤다. 하지만 그중에서 나의 어떤 행동이 유산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걸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살리고 죽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폭풍 같은 시간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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