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캔디 상자라면
인생이 캔디 상자라면, 그때 내가 집은 사탕은 더럽게 맛없는 계피 사탕 같은 맛이었다. 씁쓸하고, 맵기도 하고, 먹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그런 맛. 그것도 꿀꺽 삼키면 안 된다고 하고, 서서히 온전히 그 맛을 음미하면서 녹여 먹어야 한다기에, 그 맛대가리 없는 사탕을 서서히 녹여먹으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유산을 하고 나는 인공수정을 2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매우 지난하고 서서히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그때 다니던 병원이 차가 막히면 2시간 정도 걸렸다. 병원 대기실에서도 한 시간씩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난임 병원 대기실은, (유산 2회, 인공수정 2회, 시험관 2회 경험자로서) 감히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쓸쓸한 곳 중 하나이다. 다들 기다림에 지쳐있다. 병원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아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훨씬 더 무겁고 지치게 한다. 그래서 난임을 어두운 터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난임 병원 대기실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아기를, 다들 어른스럽게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유산 후 회복되자마자, 씩씩하게 인공수정을 시도했던 이유는, 한번 유산을 하고 나면 임신이 더 잘 될 거라는 주변의 위로 같은 경험담을 믿었고, 또 이 모든 어려움을 빨리 극복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인공수정이 실패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더 이상은 그러지 못했다. 진료실에서, 이제 시험관을 해야겠네요,라고 쿨하게 말한 내 입술과 다르게 눈에서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줄줄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어른스럽게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남편은 병원 주차장에서 나에게 말했다.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이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그렇게 수없이 얘기를 했고, 나는 집에 돌아올 때쯤 눈물을 그쳤다. 나는 무척 지쳐있었고, 남편과 나는 이제 좀 쉬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쉬었다.
쉬는 중에 틈틈히 해외 여행도 다니며 재밌게 놀았다. 그런데 숙제를 미루고 있는 것 같아서, 항상 기쁘지만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못난 마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원래 아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데다가, 여러 상처를 겪고 나자, 아가를 가까이하는 것 자체가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아기에 대한 화제는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을 때, 축하하는 자리조차 피하고 싶어지는 때가 많았다. 지금 쓰면서도 정말 못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점점 못나지는 내가 싫었다. 진심으로 축하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나는 옹졸한 인간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애기하기 시작하면 울 것 같아서 이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할 수도 없었지만, 어느 날 남편에게는 솔직하게 말했다. 난 사람들이랑 아기 얘기를 하는 게 힘들다고, 내가 못된 것 같다고. 그랬더니 남편도 나처럼 느낀다고 했다. 우리 둘 다 아기가 없으니 공감하기가 어려운 얘기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고 했다. 그때부터 였나 보다. 남편이 괜찮아, 다 자연스러운 거야 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남편은 나에게 그 말을 참 많이 한다. 이후에 시험관 시술을 하며 내가 호르몬 변화에 눈물을 펑펑 흘릴 때도,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릴 때에도, 임신 후 바이오리듬이 무너질 때에도, 그리고 출산한 뒤에도, 항상 괜찮다고 얘기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좋아질 거라고. 괜찮아, 다 자연스러운 거야. 그 말은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 내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시나마 잠재워주곤 했다. 사랑하고 예뻐하긴 힘들었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도 내 못난 모습 그대로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