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하지 않는 전쟁광들의 위험한 인용
"요즘 신문의 오피니언 페이지와 TV 화면에는 여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지 국민들에게 가르치려는 사람들로 가득찬 것 같습니다."
MSNBC 진행자 메흐디 하산이 22일 밤,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일갈했다. 아프간 종전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전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지키세요! 단, 개인적으로 침묵의 시간을 좀 가지는 건 어떨까요. 뭔가 말을 하고 싶다면 먼저 '죄송합니다'로 시작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전쟁을 지지하는 매파 정치인, 군수 산업체들과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받은 전직 군사 관료들 여기에 작금의 혼란을 비난만 하는 언론들을 겨냥한 한마디였다.
당당한 전쟁 유발자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콘돌리자 라이스가 지난 17일 워싱턴 포스트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했다.
"7세기 동안의 탈레반 통치와 30년 내전을 거친 아프간이 안정된 정부로 가는 시간으로 20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지났다면 아프간은 우리의 전략적 이익에 도움이 됐을 겁니다."
무능한 아프간 정부의 부패한 구성원이라도 미국은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며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한 것. 부시 대통령 임기 후반기 미국 최고의 외교라인이었던 라이스는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9/11 테러 이후 아프간 침공을 결정할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다.
"만약 미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우리를 믿었던 아프간 사람들에게 긴급 피난처를 제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그들을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라이스는 20년 전 자신이 결정한 아프간 파병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철군 조치를 비난하며 미군을 도왔던 이들이라도 챙기는 게 미국 대통령의 도리라며 엄중하게 훈계하며 긴 글을 마무리한다.
"아프가니스탄과 그 국민들을 버리는 것은 비극적이고 위험하며 불필요합니다... 미군의 철군 동기는 무모하며 큰 전략이 아닌 정치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영원한 전쟁'을 끝내자는 어리석은 정치적 구호에 따라 철군이 결정됐습니다."
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도 25일 그의 웹사이트에 비난 글을 올린다. 바이든 대통령이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한 '영원한 전쟁을 끝내자'는 말은 정치적 수사라며 비아냥댄다. 1997년부터 10년간 집권한 영국 최장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블레어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세계 전쟁"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긴밀한 동맹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로 한 결정은.. 지난 20년간 이루어진 긍정적인 성과를 훼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지하드 단체가 미군 철군을 환호하고 있습니다."
블레어는 중동에서 정점 영향력을 잃어가는 군사 개입을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변함없이 지지했다. 이는 2007년 사임의 핵심 이유였다. 영국 언론들로부터 '조지 부시의 푸들'로 조롱받았던 당사자는 2021년에도 그 입장을 고수 중인듯하다.
"탈레반이 카불 미 대사관에 깃발을 내건다면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가. 나약함, 무능, 전략적 모순이 겹친 총체적이고 완전한 실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바이든에 대한 비난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그가 임기 말인 작년, 탈레반과 맺은 협상에 대한 수습을 바이든 대통령이 하고 있다 전한다. 신문은 바이든이 철수와 전쟁 확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아전인수
8월 13일, 뉴욕포스트 신문은 폐허 속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아프간 노인의 사진을 1면에 커다랗게 실었다. 히잡을 쓴 그녀의 손엔 멍든 얼굴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딸의 사진이 들려있다. "바이든의 사이공"이란 커다란 제목 아래엔 '우린 여성들을 탈레반의 야만속에 버려뒀다'는 소제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문은 "(철군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바이든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의 대패는 전적으로 바이든에게 달려있다 주장한다.
지난 대선 때 헌터 바이든의 노트북을 확보해 음란한 동영상과 스캔들을 찾아냈다고 하던 타블로이드 신문은 요 근래 아프간 여성 인권에 보이는 큰 관심이 낯설다.
9/11 테러범을 색출을 명목으로 한 2001년 아프간 침공 당시에도 전쟁을 옹호하는 이들은 탈레반 치하 여성 인권을 앞세웠다.
미군의 폭탄이 아프간에 투하된 후, 뉴욕의 백인 민주당 하원의원은 직접 부르카를 입고 의회 연설을 한다. 탈레반에 의해 직장도 학교도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 아프간 여성의 삶이 어떻게 나아지는지에 대한 연설 중 그는 부시 대통령을 칭찬한다.
"부시 행정부가 전쟁과 동정심의 균형을 유지해서 폭탄뿐 아니라 먹거리도 함께 떨어뜨리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테러와의 싸움은 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을 위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젠 아프간 여성들은 더 이상 집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딸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군이 카불을 함락하자 남편 조지 W. 부시 대신 영부인 로라 부시가 라디오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모두 아프간 여성의 인권이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쓰였다며 비난받고 있다.
이는 아프간 철군을 공격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언급하는 논란과도 맞닿아 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엔 2만 8000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수준 높은 한국 군대도 단독으로 북한을 저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전직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라이즈 전 국무장관은 주한미군을 아프간 여성 인권처럼 사용 중이다. 한반도보다 쉬운 아프간에 더 오래, 더 많이 주둔했어야 한다며 바이든이 '성급한 결정'을 비난한다. 2019년 9월 CBS 토크쇼에서도 전 장관은 미국이 60여 년간 한국의 평화를 지켜왔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 부시 행정부에서 일한 우파 논객도 탈레반과 북한을 비교하며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했다. 탈레반보다 앞선 북한군에 한국이 공격받을 때,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한국은 붕괴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비극적인 70년 한반도 휴전 상황이 전쟁 옹호론자들에겐 아프간 여성들의 인권만큼이나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프간에서 패배한 미국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왔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시사 코미디 호스트 존 올리버는 8월 22일 자신의 쇼에서 '패전'이라 단언한다. 20년간 미국은 아프간 땅에 2조 330억 달러를 쏟아부었고 2448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46년 전 베트남 사이공 철수 당시 허둥지둥했던 치욕을 재현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이번엔 제대로 복기할 수 있을까 싶다.
전쟁을 결심하는 대통령에 의회는 승인해줬고 언론은 폭격을 미화하고 합리화해주었다. 그 사이 거대한 방위산업체들은 더 많은 무기를 팔았고 엄청난 지원을 받았고 큰 수익을 거두고 로비를 해왔다.
전쟁을 일으킨 이들은 부끄러움 없이 대통령을 비난중이지만 그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몇 세대를 더 보낼 것이냐며 간신히 그 고리 하나를 끊었다. 그사이 지지율은 역대 최저치가 되었다. 올리버의 일침은 그래서 더 아프다.
"바이든이 다른 국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고립주의를 주장하고 싶다면 환영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개입해서 비참해진 나라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될 말입니다."
바로 그 나라 사람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7만 1000여 명이 숨졌다. 대다수는 여성과 어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