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요즘 나의 최대 노력은 마음 속 짐 가방을 들고 내려놓는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간을 조금 과거로 돌려야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사연일 지도 모르겠다.
대학교 4학년 시절, 고등학교로 한 달간 교생 실습을 나갔다. 운 좋게도 모교로 배정이 되었다. 여전히 학교를 지키고 계신 선생님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내 추억이 켜켜이 쌓인 그 공간에 공식적으로 다시 오갈 수 있다는 점이 나를 가장 들뜨게 했다. 일면식 없는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니던 학교라는 공간에, 내가 입었던 것과 같은 교복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발끝부터 간지러운 사랑까지 샘솟았다.
교생 실습 2주 만에 나의 달뜬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힘들었다. 교생 실습 과정 자체가 어려울 것은 전혀 없었다. 여러 행정 업무와 수업은 오히려 내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매일 마음이 힘들었다.
상담 교생 실습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 같은 특정 과목들과는 다르게 우리의 주 업무는 수업이 아니라 상담이었다. 각 학급을 부담임제로 배정받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지식을 들려주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마음을 처음부터 편히 열어준 친구들도 있었고, 꽤 시간이 필요한 친구들도 있었다. 상담 과정이라던가 아이들과의 유대 관계가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상담 그 이후였다. 상담이 끝나고 나면 나는 자꾸만 동굴로 기어 들어가 숨고 싶은 시간들이 많아졌다. 아이들이 지고 있는 그 삶의 무게를 그대로 들고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대부분은 자신들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가 가진 마음의 짐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런 형상이기는 하지만, 미성년자인 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그 짐의 무게가 훨씬 무겁고 가혹한 것이었다. 매일 파도처럼 내게 쏟아졌던 그 마음들은 이미 내가 예상했던 수위를 넘어선 것들이었고, 나는 그 파도를 맨 몸으로 받아내기가 몹시 벅찼다. 있는 힘을 다해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수용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끝은 늘 씁쓸했다. 나와의 이 시간이 끝나고 나면 다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조금도 달라진 것 없는 그 삶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속상했다.
물론 본질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상담자라고 해서 완벽한 해결사의 역할을 해 줄 필요도 없고, 대부분의 내담자들이 상담자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끝나지 않는 파도들에 휩쓸려 휘청거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결국은 내 문제였다. 매일 옷자락에, 손발 끝에, 드나드는 숨결에, 머리카락에 아이들의 짐을 주렁주렁 하나씩 매달고 퇴근했다. 그들의 파도에 나의 일상이 잠식되고 있었다.
교생 실습 한 달 만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나는 상담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공식 선언을 했다. 한 편으로는 그제라도 나의 한계를 깨달아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상담 선생님이라는 옷은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배운 대로 상담을 잘 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나만의 지나친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그 전에 내가 한 인간으로서 더 단단한 사람이어야 했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가 다시 아이들을 만났다. 이번에는 학교 밖이었다. 나는 경찰서에서 아이들을 다시 맞이했다.
범죄심리사가 되었다. 경찰서에 입건되는 청소년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구조화된 질문지에 따라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얻고, 심리검사를 수행하고, 그들의 행동 이면에 숨어있는 그림자를 찾아내는 일을 했다. 아이와 헤어지고 나면, 수집한 정보들을 모아 재비행 위험성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아이가 이후에 또 비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 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보고서였다. 검찰로 송치된 아이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을 받을 때 참고하는 여러 자료 중 하나를 맡는 셈이었다. 그러니 엄연히 말하자면, 상담이 아니라 면담이었다.
처음에는 경찰서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잘 몰랐다. 수련생인 탓에 슈퍼비전을 받던 그 때는 보고서를 실수 없이 잘 작성하는 일 자체에 매몰되어 이성적으로, 학문적으로, 기술적으로 접근했던 것도 같다. 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보람을 느꼈던 것도 같다. 한 편으로는 1회성 만남이라는 것도 은근히 위안이 되었다. 두세 시간의 만남을 정리하고 심리검사를 분석해서 한 편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면 그걸로 끝인 관계였다.
범죄심리사 1급이 된 지 10년 차. 경력이 쌓이는 만큼 나와 만난 아이들의 얼굴도 하나씩 쌓였다. 언제부터인가, 어딘가 익숙한 파도가 내 발목 근처까지 올라와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범죄가 아니라, 그 아이의 삶 자체가 여과 없이 내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정확히 판단하고 예측하려는 마음 대신, 아이들의 앞 날에 내가 두 번 다시없는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보고서를 쓰는 날이 늘었다.
20대의 싱글인 내가 바라보는 아이들과 30대의 엄마가 된 내가 바라보는 아이들은 달랐다. 아이들은 변함이 없었다. 가출을 일삼기도 하고,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도 하고, 무면허 운전을 상습적으로 하거나, 일반 절도에서 특수 절도까지 다양한 유형의 절도를 행하고, 성관련 범죄도 성인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범하며, 폭력의 수위도 천차만별에,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기도 하는 아이들. 이전에는 그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행동과 처한 환경, 이후 재비행 예측이 전부였다. 실로 이성적인 접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꾸만 그 아이들이 지나온 삶 전체가 내게로 다가와 흠뻑, 나를 젖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또, 교생실습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요즘 가방을 들고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진짜 가방은 아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 마음 속 작은 가방을 하나 든다. 아이들을 만나는 동안 그 가방 안에 그들의 이야기와, 삶과, 고통과, 내면의 외침을 담는다. 짧은 시간 안에 한 아이의 인생이 가방에 무겁게 들어찬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 가방을 손에서 내려놓는다. 보고서를 쓸 때를 제외하고는 그 가방을 저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 시간이면, 정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연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진심을 다해 보고서를 쓴다. 보고서 작성이 끝나면 가방을 비운다. 다음 아이를 위해 다시 빈 가방으로 다른 면담을 기다린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온전히 돌아보고, 또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노력이었다. 교생 실습 때처럼, 다시, 유약하게 나의 일상을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그렇다고 또 나의 일상을 지키느라 그 아이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아이들과 헤어지는 순간 다짐하듯 인사한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약속해 줄 수 있지?" 평생, 다시는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자는 약속으로 이별을 맞는다.
핸드폰 전화가 울리고, 경찰서 이름이 뜨면, 다시 마음 속에서 빈 가방을 찾는다.
나와 그 아이들 모두를 위한 나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