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비 Feb 26. 2024

'꾸밈'의 역사

나를 알아가는 시간, 꾸밈의 모든 순간들은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예뻐지고 싶었다. 예쁘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던 그 언젠가부터 그랬던 것 같다. 예쁘지 않은 얼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한없이 나를 귀여워했지만, 결코 그 출발이 객관적 예쁨이 아님을 알았다. 세상이 예쁜 사람과 예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확실한 경계로 나뉘기라도 한 것처럼, 그 두 진영만이 전부인 것처럼, 예쁜 사람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간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진실 되게 예쁘다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예쁘지 않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골백번도 넘게 싸웠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이 글은 그 지난한 싸움에 대한 회고록이다.  


   




오해를 참 많이 받았다. 특히 눈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 눈을 단춧구멍에 비유했다. 단추에 실이 지나가는 알알이 작은 그 구멍 같다는 뜻인 줄로만 알았다. 단추를 꿰는 반대편 옷감의 가늘고 기다란, 좁디좁은 구멍이라는 걸 안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수업시간에 조금만 눈을 아래로 깔고 있으면 졸지 말라는 선생님의 핀잔을 들었다. 멍 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나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지 않고 눈동자만 돌려 시선을 옮길 때면 왜 기분 나쁘게 쳐다보냐는 상대의 날선 반응을 종종 들었다. 어리고 나약했던 나는 바람 빠진 풍선마냥 시나브로 위축되기 바빴다. 매 순간 눈에 더 힘을 주고 뜨기 위해 노력했고, 어딘가를 바라볼 때는 곁눈질이 아닌 정확한 시선 고정을 선택했다.     


쌍꺼풀 없는 가느다란 내 눈이 싫었다. 딱풀을 실 핀에 발라 눈꺼풀에 선을 긋기도 했고, 정성들여 쌍꺼풀 테이프를 붙이기도 했다. 아주 짧은 만족감 뒤로 따갑고 쓰라린 영광의 상처들만 남기는 행위였다. 숱 없고 짧디 짧은 속눈썹도 싫었다. 학창 시절엔 숱 많고 짙은 속눈썹을 가진 친구의 눈을 그저 쓸쓸히 선망할 뿐이었다. 20대가 되면서는 뻣뻣한 일회용 속눈썹을(절대로 일회용으로 쓰지 않았다) 사 모았다. 하루 종일 눈두덩이에 돌을 얹고 사는 것 같았다. 참으로 무거운 대가를 치른 아름다움이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짙은 눈동자 색깔까지 불만하기에 이르렀다. 순정만화 주인공에게서나 볼 법한, 화려하고 생경한 무늬가 촘촘히 인쇄된 밝은 갈색 컬러렌즈를 꼈다. 한 쌍에 만원도 채 하지 않는, 위생과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 렌즈들이었다. 나의 눈과 마음에 학대였던 다양한 행위들을 혹독하게, 오랜 시간 계속 했더랬다.     






인터넷을 타고 하두리 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내 머리통보다 훨씬 높은 곳에 달린 작고 동그란 카메라에 나를 담았다. 눈부신 햇살을 조명으로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캠 설정 섹션에서 뿌옇게 블러처리를 하고, 하얗게 밝기를 높였다. 여러 겹 보호막을 거쳐 모니터 화면에 비친 나는 선명하지 않은 무엇이었다. 예쁘지도, 예쁘지도 않은 것도 아닌, 아니, 정확히는 대략의 얼굴 형태만이 겨우 인지 가능한 상태의 형상이었다. 도화지 같았다.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내 손길을 따라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백지 같은 공간. 


초등학생이었다. 엄마 화장대에 손을 댈 깜냥은 전혀 없었다. 내 책상 위에는 50여 가지가 넘는 색상의 색연필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물에도 잘 녹아서 다양하게 채색할 수 있는 색연필이었다. 나는 그 색연필로 본격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종이가 아닌, 내 얼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 모니터 속 불완전한 형상이었던 내가 조금씩 형상을 갖추곤 했다. 내 마음대로 그려서 만들어 낸 나의 얼굴이었다. 엄마 몰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피부 위에 뻣뻣하게 굳은 색연필을 벗겨내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모니터 화면 속에 남긴 그림 같은 내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용서했다. 내가 아닌 내가 하루가 멀다하고 차곡차곡 쌓였다.    





 

스무 살, 더 이상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모니터 속 얼굴 말고, 거울 속 내 얼굴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 인생, 본격적인 화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오랜 꾸밈의 세월이 쌓인 스무 살이었다. 현실 직시도 어느 정도 가능한 나이였다. 현실은 하두리 캠과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말도 안 되게 다른 형태의 얼굴은 꿈도 꾸지 않았다. 현실에 발 닿고 살기 위해 전략적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눈을 가진 연예인들을 찾아 꼼꼼하게 분석했다. 장윤주, 한혜진, 가인, 정인, 박정현 … 그녀들은 모두 나와 같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스모키 화장이 유행처럼 번지던 그 때, 유행의 물살 위에서 가장 많은 특혜를 누린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그 덕에 손기술이 날로 늘었다. 가지고 있는 예술적 재능을 한껏 끌어 모아 얼굴에 쏟아부었다. 옅은 속쌍커풀을 십분 활용했다. 눈을 뜨면 안으로 쏙 말려들어가는 그 모든 공간이 채색 공간이었다. 눈을 감으면 눈두덩이가 시커멓게 보일 정도의 두께였다. 검은색만을 고집하던 아이라인은 갈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사실 선택한 방안만 달랐을 뿐, 하두리 캠으로 담아낸 모니터 자아의 연장선이었다. 점점 더 교묘하고 섬세하게, 알록달록한 화장 뒤로 열심히 숨어들었다.   





  

그 언젠가, 절친했던 누군가가 내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둥글게 휘어지는 눈웃음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단춧구멍만큼이나 작은 마음 그릇을 가졌던 나는 그 고마운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금 불완전하게 그 말을 담아, 고운 눈웃음만을 더 열심히 사람들에게 내보였다. 더 밝고 자신 있게 웃기보다 웃을 때마다 아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휘어진 눈만 보여주는 내가 되었다.      


그 뿐이랴. 실제로 진심 가득 담아 내게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알 지 못했던 진심어린 말들이 속절없이 반대편 귀를 타고 흘러가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칭찬에 부응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화장에 몰두했다. 내게 쏟아지는 긍정적인 평가를 오로지 화장한 상태의 내 모습으로만 한정지었던 탓이다. 몸이 아파도, 시험 기간이어도, 심지어는 모자를 덮어쓰고 급히 나가는 날이어도 아이라인 만큼은 무조건 사수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쓰럽고 못난 마음이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예쁘다는 말에도 나의 꾸밈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화장한 일상 속 자아와 함께 모니터 속 자아도 계속해서 진화했다. 하두리 캠 물결은 어느새 디지털 카메라(디카)로 옮겨가고 있었다. 부모님께 선물 받은 그 디카로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짙은 화장을 겹겹이 껴입은 채였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컴퓨터로 옮긴 원본에 현란한 포토샵 기술을 쏟아 부었다. 날렵하지 않은 턱을 깎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피부결을 매끄럽게 문지르고, 눈의 크기는 전체적으로 미세하게 늘렸다. 당시에는 꽤 자연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더 예뻐 보이는 셀카라고 믿었다. 조명에 코가 날아갈 정도의 하두리 캠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지난 시간을 담은 내 셀카가 무수히 많건만 그 속에 진짜 나는 없다. 수많은 화장과 보정으로 매만진,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의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마저도 지금 보니 진짜 그 얼굴이 되고 싶었던 건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낯설고, 이상하고, 조금도 예쁘지 않은 얼굴. 때때로 그 시절의 진짜 내 얼굴을 만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반짝였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했던 나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서럽다.     






그래서 치열하고도 지지부진했던 이 싸움의 끝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글쎄. 파국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럽겠지만, 이 싸움의 결론은 각종 클리셰가 넘쳐흐르는 전형적이고도 진부한 해피엔딩이다. 결국 나는 예쁜 사람 세상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예쁘지 않은 사람 세상에도 발 붙이고 살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인 세상에 산다. 아, 이렇게 되면 해피엔딩이 아니라 한없이 열린 엔딩이려나.   

   

서른일곱.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얼굴이 좋다. 여전히 눈은 작고, 지나치게 둥근 얼굴형인데다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주근깨 같은 기미는 얼굴 전체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안다. 성형학적으로 예쁘지 않은 얼굴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이 얼굴이 더없이 좋다. 그런 것쯤은 상관 없다는 말이다. 예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나의 얼굴이어서, 오로지 나만 가진 나만의 얼굴이어서 좋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러면서 동시에 나와 연결된 수많은 가족의 얼굴이 군데군데 희미하게 덧입혀진, 다채로운 이 얼굴이 좋다. 그 뿐이랴, 지금까지의 내 삶까지 고스란히 묻어 있지 않은가. (실제로 나의 눈매는 꽤 많이 둥글고 부드러워졌다. 지나온 세월이 켜켜이 녹아있다고 믿는다.)      






성공과 실패를 화두로 글을 쓰는 내내 나의 꾸밈을 돌아보았다. 과거의 안쓰럽고 유약했던 내가 지금의 단단하고 곧은 내가 되기까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결정적인 어떤 계기가 번쩍, 떠오르길 바랐는데 그러지 않았다. 작고 삐뚤고 못났던 내 마음이 가치를 모르고 밖으로 쏟아버린 순간 어딘가에 그 계기들이 숨어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시나브로 쌓인 추억더미에서 치유의 손길들을 건져 올린 시간이었다. 나를 투명하게 담아준, 사랑했던 이들의 따뜻한 눈길 덕에 누구에게나 진실되게 예쁘다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포기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결코 모두에게 예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 마음도 서서히 옅어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그 덕에 가장 문제라고 여겼던 나의 눈은 사실 내 얼굴에서 가장 매력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돌아보면 지나치게 나의 얼굴을, 눈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쉬지 않고 꾸민 세월이었다. 화장을 해서라도, 보정을 해서라도 최대한 열심히 꾸몄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무조건 모니터 화면 앞에, 거울 앞에 나서야 했다. 날 것의 내 얼굴을 꾸미고 가꾸는 과정에서 매일같이 다양한 나의 모습들과 마주했다. 정말 내 눈이 싫고, 내 얼굴이 못났다면 회피를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꾸밈마저도 성실하고 열정적인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나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나의 눈을 관통해 쏟아졌던 긴 세월의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이 기나긴 회고록은 끝내 또 다른 질문으로, 또 다른 글로 이어질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나는 왜 늘 예뻐지고 싶었나.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꾸밈의 세월에서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다시 또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낼 순간이 오기를. 잊고 지냈던 과거의 결정적 순간들이 찰랑, 수면 위로 튀어오르기를 고대하며 침묵하고 앉아 기다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회고록을 또 다른 이야기를 위한 스펙타클한 서막으로 보아도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돈보다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