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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매일글쓰기14일차

by 밤비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

연극 무대였다. 연기한 작품이 선녀와 나무꾼이었는지, 백설 공주였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 공연이었다는 것과 내 배역이 사슴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위아래로 몸에 딱 붙는 하얀 폴라티와 타이즈를 신었고 그 위로 사슴 무늬를 흉내 낸(꽃사슴이었던가) 얼룩을 붙였다. 엉덩이에는 몽실몽실한 갈색 꼬리가 매달려 있었고 질끈 묶은 머리에는 사슴뿔 모양의 머리띠를 썼다. 엄마의 빠알간 립스틱이 작은 입술 선을 따라 또렷하게 그어졌다. 차라리 루돌프라고 해야 할 만큼 하얗고 빨간색이 더 눈에 띄는 사슴이었다.

이상하게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왜 사슴이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아기 사슴 밤비도 아무 소용 없었다. 사슴이 주인공이 아닌 탓이었다. 들러리처럼 무대 한 켠에 서서 다른 동물 친구들과(토끼, 다람쥐, 여우 같은 친구들) 다 같이 입을 맞춰 짧은 대사를 쏟아내는 것이 전부였던. 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삼십 대가 되었지만 필명도, 온라인 아이디 모두 여전히 밤비다. (간혹 밤에 내리는 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여기서 밝혀두는 바, 아기 사슴 그 밤비다) 그 때 그 날의 사슴을 기억하며 붙인 이름은 결코 아니다. 굵은 비가 내린다. 빗소리 웅장하게 울리는 저녁, 갑작스레 떠오른 하나의 기억이 이제는 내게 되묻는다. 지금의 너는 인생의 주인공으로, 네가 원하던 밤비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언젠가의 무대에서처럼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우두커니 가장자리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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