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글쓰기 26일차
학교 곳곳에 애정하는 공간들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공간에서부터 개인적 서사가 녹아있는 공간까지. 그 공간이 무엇이건 간에 가장 짜릿한 순간은 나의 어린 남자, 아이가 그 공간에 들어설 때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낀다.
사범대 건물 근처 담벼락에 (소위 개구멍이라고 부르는) 작은 구멍이 하나 있다. 거길 통하면 숲길이 펼쳐지는데 누가 봐도 오랜 기간 사람들이 오가며 밟고 다져 만든 좁다란 길이다. 이번에 방문하고 안 사실 하나,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조금 접어 소심하게 들어가야 했던 원래의 입구 옆에 커다란 입구가 하나 더 생겨 있다. 어느 입구를 통했건 계속 걸어도 괜찮나 싶은 길을 그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주 작은 다리 하나가 나온다. 다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커다란 바위 두 어개를 징검다리 삼아 건넜던 과거에 비하면 사람 한 명이 딱 서면 될 정도의 규모로 제작된 나무다리가 있어 안정적으로 길을 건널 수 있다. 다리를 건너서도 계속 걸어야 한다. 어쩐지 길을 잃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만 괜찮다. 길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무수한 이들의 발길이 다져놓은 직선의 공간의 믿을 것. 조금 더 걷다 보면 사람 소리가 먼저 들릴 수도, 달큼하고 구수한 냄새가 먼저 마중 나올 수도, 혹은 작은 건물이나 연기가 보일 수도 있다. 이제 됐다. 도착했다.
파전, 부추전, 김치전, 도토리묵, 칼국수, 비빔밥, 삼겹살, 두루치기, 그리고 막걸리!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에 폭 안겨 식사를 즐기면 된다. 무엇을 고르건 풍족한 맛과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 곳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두 어 군데, 가게 명칭이 있긴 하다). 우리 때는 그냥 '산성 가자'라고 하면 통했다. 원래는 등산하는 고객들만을 위한 식당이었을 텐데 학교와 통하는 비밀 통로가 생기면서 학생들의 아지트도 되어 주었다. 간단히 점심 먹으러 들렀다가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서 자체 휴강을 하거나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수업에 들어갔고, 가게 하나를 통째 빌려 학과 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공간에 아이가 있다. 최근 거듭 우울해하고 힘들어하고 또 지쳐하는 나를 위해 두 남자가 고군분투 중이다. 갑작스럽게 (식사 시간도 아니었는데) 산성에 가고 싶다는 나의 제안에 두 남자가 함께 했다. 아이는 가는 내내 뭔가 나오는 게 맞느냐, 길 잃는 거 아니냐, 벌레 많은 것 아니냐, 가게 오늘 쉬는 거 아니냐 등등 계속해서 걱정했지만 거짓말처럼 펼쳐진 공간에 몹시 신기해했다. 간단히 맛만 보자며 칼국수와 부추전을 시켰는데 칼국수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는 아이를 보며 웃음이 퍼진다. 이십 대의 내가 녹아 있는 공간에 9살 내 아이가 묻어난다. 부추전의 땡초를 먹고는 사레 걸린 아이를 보고 주인 이모가 사이다 하나를 얼른 건넨다. 애가 먹을 건데 빼는 걸 깜빡했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아이는 맛있으니까 괜찮다며 날름 서비스 사이다를 마신다. 이십 대의 네가 보이는 것도 같다.
나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와 만나 너의 미래로 이어진다. 또 다른 색채와 온도로 덧입혀진 이 공간을 나는 또 오랜 기간 애정 할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