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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Oct 12. 2024

너의 하늘

기댈 곳 없는 아이들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부러 묻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더 많다. 아직 채 단단해지지 않은 여린 몸 너머에 새겨져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의 협곡을 생각하면 그만 뜨악한 마음이 들어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하고 싶었던 적도 많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직업과 관계없이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변했다. 이 아이들의 세계를 알고 난 뒤, 나는 결코 아무것도 모르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간 만났던 아이들의 사례를 꺼내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제아무리 익명을 보장해도, 여러 명의 아이들 이야기를 내 마음대로 섞어 쉽사리 특정할 수 없도록 꽁꽁 숨겨도 내 입을, 내 손을 떠난 이야기가 자체적으로 무럭무럭 키워낼 어떤 힘이 두렵다. 그것들이 또 다른 누군가를 집어삼킬까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도전에 가깝다. 그럼에도 힘겹게 용기를 내는 것은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바람에서다. 

 

  



"아, 그냥 좀. 애들이 자꾸 꼽주고 놀려서 좀 짱났거든요."


나이 불문, 가끔 아이들과의 대화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매력이 있다. 느닷없이 자기 친구 이름을(실명을) 여러 명 나열해서 이야기의 맥락을 놓치는 건 다반사이고, 분명 A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뚝 잘라 Y나 Z까지 마디 점프를 하고는 돌연 종결하는 경우도 있다. 그 날도 그랬다.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는데 맥락 없이 진도가 불쑥 나가버린 것. 어떤 애들이, 무엇으로, 왜 놀렸고 너는 어떤 지점에서 불편감을 느꼈는지 묻고 들어야 할 것들의 목록이 좌르르 머릿속을 메웠다. 


"그래서 우리 애들은 학교 마치면 바로 집으로 가요. 애들한테 안 들키려고."     

 

자, 설명이 필요하겠다. 혼란스럽겠지만 앞 대사 다음에 바로 저 대사가 이어진 것도, 한 명이 하고 있는 말인 것도 맞다.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이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표면적으로 결코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은근한 기싸움이 불편했다. 이런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대처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 아이는 최대한 조화롭게 섞여들기를, 모난 돌이 되지 않기를 택했다. 때문에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결정했고, 두 번째 대사도 그러한 맥락에서 따라가야 한다. 


그래도 단 번에 이해하기는 힘들다. 집에 바로 가는 것을 들키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우리는 누구와 누구를 말하는가? (형제자매는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다시 한번 이야기를 정리하며 되묻자 아차, 하는 표정으로(그거 내가 말 안 했어요? 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아이의 설명이 이어진다. 


“아, 저 보육원에 있거든요. 이거 아는 애 한 명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에 아이가 말했던 ‘집’이란 당신이 간편하게, 자동적으로 떠올린 그 집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란 같은 보육원에 생활 중인 다른 어떤 친구들 중 한 명을 말한다. 이제 나는 보다 더 복잡해진다. 이쯤 되면 내가 아는 보육원의 사전적 의미(부모나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을 받아들여 기르고 가르치는 곳) 만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쩐지 오늘 면담은 길어질 것 같다는 사실도. 


필시 면담 초반 가정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맹점이 이런 식으로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이혼 가정의 아이였고 부모 중 한 명이 아이의 양육권을 가졌다. 용돈이나 품행 문제로 자주 다투고 마찰이 일어나는, 매우 취약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온 적 없었다. 아이는 세상을 달관한 사람처럼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빠가 저 못 키우겠다고, 거기나 가라고 해서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만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님에 대한 혐오가 부지불식간에 스친다. 경제적 문제도, 직장 문제도 아니고 ‘힘들어 못 키우겠다’는 일종의 포기 선언을 그렇게 쉽게 했다고? 그것도 아이의 면전에 대고? (이 아이의 정확한 나이는 밝히지 않겠다. 중고등학생 어드메를 상정해도 좋다. 적어도 신체적 보육으로 시달리는 나이는 끝났다.) 아이가 수습하듯 말을 잇는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락은 주고받는다고. (그러나 나중에 더 이야기하고 알게 된 사실. 그는 아이와 앞으로 함께 살 생각이 없고 재혼한 가정에 충실하고 싶어했다. 아이가 얼른 성인이 되기를, 알아서 남처럼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경찰서, 범죄에 연루되어 입건된 아이 맞다. 가출도 빈번했고 초범도 아니다. 이 아이가 저지른 비행 행동을 감싸줄 생각은 없다. 환경 요인 때문이건, 개인 내적 요인 때문이건 이 아이는 현재 진행형으로 명백한 잘못들을 저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를 포기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비행 청소년 지도의 주안점이 무엇이던가, 교정보다 처우 및 치료 아니던가. 그들 안에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희망과 잠재력의 불씨를 더 크게 피워주지는 못할망정 구둣발로 짓밟는 것이 아이의 유일한 핏줄이었다니. 설령 이 세상 모두가 등 돌리고, 삿대질하며 비난해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할 부모가 포기를 선언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하늘을 지붕 삼아 사는 아이들이 많다. (나의 이 표현으로 말미암아 드넓은 초원 바닥과 끝없이 펼쳐진 하늘 지붕 아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유유자적한 삶을 떠올리지 않았기를.) 하나의 사례 속에 무수한 아이들을 숨기느라 극단적으로 이야기가 흘렀을 거라 기대하고 싶겠지만 아니다. 더 극단적인 이야기들을 깎아내고 지워내고 뭉개어 사소한 수준으로 압축한 것이 겨우 이 정도, 그게 맞다. 


나를 이 세상으로 끌어당긴 부모마저 그 어떤 식으로도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는, 하다 못해 내 몸 허나 편히 기댈 공간마저 제공해주지 못하는, 혹은 물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제공하면서도 심적으로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빼앗는 환경에 던져진 아이들. 그들에게는 오히려 아무런 가림막 없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하늘이 더 크고 온전한 안식처가, 위안이, 포근함이 되어줄 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아이들에게서 저마다의 하늘을 듣는다. 비바람에 펄럭이는 비닐처럼 얇고 위태로운 지붕이어도 좋으니 이 아이를 지켜줄 단 하나의 지푸라기가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나는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 글을 읽은 그대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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