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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Sep 02. 2019

교정 일기

I see you

1. 교정 세 달 차. 거울 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맨얼굴 곳곳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애인들의 얼굴은 구석구석 들여다보고서는 내 얼굴의 만듦새를 이런 식으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알던 점의 개수는 4개 모르던 점은 4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비염 단짝 다크써클,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길고, 왼쪽 볼이 오른쪽보다 더 넓고, 콧방울은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치아 중심선이 어긋난 건 치아의 배열 문제가 아니라 골격 문제다. 때문에 제일 관건인 치아 이동 상태를 포함해 입술의 두께와 나비존 모공의 요철과 부위별 피부 톤 차이 같은 것들을 살핀다.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얼굴이 문득 낯설어져 어쩐지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게슈탈트 붕괴의 갓길에서 나르시시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된달지. 반한 파트 말고 타자로 느끼는 파트. 자기애의 시작이다. 너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본다.
“I see you”
아바타에서 나비족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던가.

출처: Avatar, 2009

2. 씹는 즐거움을 잃었다. 사는 낙이 없다. 뭘 먹어도 절반의 맛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두 달 동안 치킨을 끊었다가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 월치료 전날 다사랑 순살을 뜯었다. 결국 작은 어금니 장치가 하나 떨어져 다시 갈아내고 부착했다. 피데기는 냉동실 구석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예민 보스 필수템 초코우유를 차곡히 쌓으며, 어찌어찌해서든 살 길을 찾는 생존 본능에 새삼 감탄한다. 쿠크다스형 인간에게 멘탈 유지는 중요한 이슈다.

3. 한 달 반에 걸쳐 장치를 나누어 부착하며 점점 더 사라져 가는 혀의 안식처와 방해받는 발음에 충격을 먹고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했다. 집에 들어앉아 발음 연습을 하겠다고 책 몇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다가 그만두었다. 입 안쪽으로 늘어선 교정장치가 막고 있는 건 발음이라기보단 말의 생동감이다. 자의식을 덜어내려면 차라리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거울과 대화를 한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다시 1번으로 돌아간다.

출처:wikimedia

2-1. 내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기나 했던 것인지 돌아본다. 이게 다 거울 탓이다. 이 어쩔 수 없는 결핍을 어찌해 보겠다는 합리화로 사랑을 내세웠던 건 아닐까. 바로 어제까지 존재하던 것이 “그만하자”는 한마디에 부재라고 선언되는 이별의 공동에 체증이 인다. 판이 이런 모양새로 굴러가면 원망은 당신이나 내가 아니라 삶 전체로 향한다. 이별의 도처에 자기 연민이 널브러져 발에 채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그대로 바라보던 —“I see you”— 연인이었나 우리들은. 적어도 나는.

3-1. 하지만 간단하게, 그때의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나이만큼 불어난 시절을 번호표대로 줄 세워 오늘의 시세로 감정하기 시작하면 천연색이었던 기억도 하나 둘 폭락하며 잿빛이 되는 법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사랑이라니, 제정신인가.

4. 자아성찰은 자기비판과 한 방에 살고 그 집 지하 방에는 자기혐오가 세 들어 산다. 염치 따위 애저녁에 치운 자기혐오는 밤마다 기어올라와 제 집인양 살림을 축내는데, 냉장고 털리는 줄 모르고 방구석에 들어앉아 생각만 하고 있으면 자기 연민이라는 유령을 몰래 끌어들여 둘이 오붓하게 집을 점거한다. 그런 식이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난다. (feat.기생충)

5. 해서, “난 좋은 여자(남자)가 아니야.”라는 말의 한가운데에는 자기가 불쌍해 죽을 지경인 귀신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 귀신은 늘 애착 인형을 들고 다니는데 걔 이름이 패배주의. 귀신이 직접 알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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