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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Sep 02. 2018

제주에서 길을 잃다

제주도 여행 #1

Prologue.


정신없는 아침을 보내고 김포공항으로 가는 5호선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다. 오롯이 혼자 어딘가를 떠나는 것이 얼마만인지... 많이 관찰하고, 느끼고, 사색하고, 묵상하고, 경탄하고, 잔뜩 먹고, 푹 자야지. 자주 느리게 걷고, 말은 좀 적게 하고 말이다. 이렇게 펜으로 긴 글을 적어 내려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릴케의 말처럼 많은 도시, 사람, 물건을 보며 한평생 의미를 모아 좋은 시를 써야지.

시인은 벌이 꿀을 모으듯 한평생 의미를 모으고 모으다가 끝에 가서 어쩌면 열 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행의 시를 위해 시인은 많은 도시, 사람,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 _ 릴케



8월 29일 수요일


#가는 길의 상쾌한 메모

 김포공항이 이렇게나 가깝다니! 역시 난 머무르질 못하는 명(?)을 타고났나 보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제주도가 나의  또 다른 앞마당이 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 온다. 으핫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혼자여도, 둘이여도, 셋이여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마법 같은 일이다. 그리고 그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기도 하다.


#당신의 멘탈을 유지하는 법

 14시 35분 비행기가 16시 25분으로 탈바꿈한 조금은 불편한 마법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름 오랜만의 비행인데, T모-웨이-사는 연착이라는 억울함을 여행 선물로 안겨주었다. 열몇 개 국을 여행하면서 나름 여행짬이 찰 때로 찼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언제나 아직이다. 그리고 그 '아직'을 새삼 쿨하게 인정하고나니 이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뭐 어쩌겠는가. 마음이라도 지켜야지.


#위에서의 사색

창가에서 본 우리세상

 오래, 자주 비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창가 자리의 신비로움보다 통로 자리의 편안함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창가 자리가 유독 탐이나 앉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길 잘했다.


 위에서 보니, 옆으론 구름밭이 보이고 아래론 도시가 보였다. 산과 바다, 섬들 사이사이로 선을 그은 듯 교묘히 이어진 간척지가 있었고, 방사형으로 모여든 길 중심엔 어김없이 도시가 있었다. 자로 잰 듯 반듯한 간척지는 인간에게 비행기 통로 자리 같은 편안함과 안전함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울퉁불퉁한 곳에서 솟아오를 수 있었던 동화들은 사라졌다. 아아, 우리의 난쟁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인간의 욕망은 땅 위에 깊이 새겨져 있고, 그것은 위에서 빤-히 내려다 보인다. 저 아래 고만고만한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위에서는 매일 보고 계시지 않을까.

사라져 가는 것들이 슬프고, 가련하고, 아름답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오름 가는 것을 포기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중. 그리고 사실은 개들에게 쫒기는(?)중

 언제 한번 쉬운 여행을 해보려나. 비행기 연착, 오름 가는 버스를 갈아타려다 해가져서 길을 잃고, 줄이 풀린 큰 개들 사이에서 약간의 위협감을 느끼다 겨우 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버스에 올랐다. "어!" 어쩜 딱 이 시기에, 제주도에, 이 버스에 함께 오른 옛 친구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참, 하나님이 나를 들었다~놨다~ 선물을 주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게다가 일정 중 하루는 같은 숙소, 같은 방(2인실)이라니. 어딜 가든 착하게 잘 살아야지.


무서웠던 멸치공장 옆에서


 그렇게 짧고 강렬한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또.. 버스에서 잘 못 내렸다. 어떤 늦은 시간이라도 몇 군데는 환하게 밝혀 있던 서울과 달리 제주도의 길은 아주 깜깜했다. 그 적막함이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웠다. 결국, 이 버스 저 버스 헷갈려하다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숙소에 내렸다. 짐을 정리하고 숙소에 있는 다락에 올라가 하루를 정리했다. 어찌하였든, 혼자여서 매우 좋은 밤이라며.

숙박 내내 가장 좋아했던 공간, 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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