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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Sep 02. 2018

봉끄랑하다

제주도 여행 #2: 우도, 성산일출봉

8월 30일

여행을 다니면 꼭 그 동네 동물과 꽃의 사진을 찍게 된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뚱해 보이는 뚱뚱한 고양이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고양이는 결국 나와 산책을 해주지 않았다. 흥) 흥겨운 아침산책을 했다. '거 참 드럽게 말 안 듣는다'는 뉘앙스의 친절한 게스트하우스 주인분을 뒤로하고 결국 걸어서 성산항으로 향하.... 다가 말고 중간에 버스를 탔다. 사람 없는 도로에 쌩쌩 달리는 큰 차들이 조금은 무서워서였다. 그래도 살아서 우도를 들어가 보고 싶었기에.


우도 여행기


#반짝이는 것이 본질

하늘과 구름과 풀과 마을은 늘 옳은 광경이다.

 오후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기에 오전에 우도를 들어갔다. 비가 온다라는 서울 측의 제주 기상예보와 달리 날씨는 지나치게 좋았다. 배를 타고 가면서 보는 바다는 실로 현실감이라곤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 실은 이게 Nature-born인데 빽빽한 도시의 건물과 현란한 간판들이 진짜라고 믿어버리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봉끄랑하다

어쩐지 꼭 찍고 싶었던, 해녀 할머니의 뒷모습
우연히 내린 곳에서. 서울에선 돈 주고 심어도 잘 안크는 선인장이 여기선 잡초마냥 잘 자란다.

 오후에 잠깐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오기 전까지 혼자 우도를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우도는 27회 구간을 1바퀴 도는 (중간중간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는데, 다음 버스가 15분 후면 바로 오니 걱정 없이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마을 순환버스를 탔다. 2018년 하반기 버킷리스트에 '무심코 내려버린 경험하기'가 있었는데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이루었다. 그렇게 내가 무심코 내린 곳은 밤수지맨드라미 서점이었다. 함께 탔던 모든 사람들이 서빈백사 해수욕장에 내리고, 나는 십여분을 더 달려 서점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내렸다. 가는 동안 무슨 곡인지는 모르겠지만 바깥 해변 풍경과 찰떡같이 어울리는 클래식 한곡을 들었다. '이런 선곡은 나만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마을버스 기사님의 자랑이 정겹다. 마을버스 기사님이 알려주신 제주 말을 빌려오자면 우도는 참으로 '봉끄랑'하다. 정확한 뜻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언가 풍성하고 빵빵하고 귀엽고 정겨운 느낌의 뜻이었던 것 같다.



*한나's 급 소확행 꿀팁*

반기(6개월) 별로 소소한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소소하기 때문에 이룰 확률이 높고, 하나씩 해나가는 뿌듯함과 기쁨이 있다. 나의 2018 하반기 소소 버킷리스트는,

1. 브런치 글 출판하기 >> 클리어!

2. 시 등단하기 >> not yet!
3. Creative lab 만들기 >> 클리어!

4. 클라이밍 하기 >> not yet!

5. '무심코 내려버린 경험'하기 >> 클리어!

6.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전시회) 가기 >> not yet!

7. 뮤지컬 1편 이상 보기 >> 클리어!

8. 과학 관련 책 읽기 >> 클리어!

9. 꽃시장 가서 꽃 안고 집에 돌아오기 >> 클리어!

10. 한 밤 중 Running >> not yet!

11. 영상편집해보기 >> 클리어!

12. 을지로 인쇄소길 cafe 가기 >> 클리어!

13. 유럽 글 brunch로 옮기기 >> 진행 중!

14. 제주도 혼자 여행 가기 >> 클리어!

15. 서울 어드매 등산하기 >> 클리어!



#안녕, 우도 사람

 하수고동 해수욕장에서 (해변가에서 물놀이를 즐기기 원한다면 서빈백사보다 하수고동 해수욕장을 추천하겠다.) 나 홀로 원 없이 물놀이를 하고 (나는 나름 물에 잘 뜬다고 생각한다. 어딘가 이상한 자유형, 개헤엄, 개구리헤엄, 뒤로 뜨기 기술 등을 타 포함하자면 꽤나 잘하는 편이기도?) 바다를 마주고 보고 있는 카페에 앉았다.

결국 이 풍경은, 탕진의 매력을 보여준 잡화점의 엽서에서 얻을 수 있었다.

 '안녕, 육지사람'이라는 이름의 이 유명한 카페는 이름이 그 값을 다한 곳이다. (땅콩라떼도 맛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에 앉아 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 글을 쓰다 바라보다했다. 무엇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충만한 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 그가 지으신 이 피조세계. 바라만 보아도 넘치는 이 순간이다.


#혹시 우도 주민이세요?

 여유롭게 우도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우도에서 잠깐 보기로 했던 친구들이 도착했다. 우도에 오기까지 여러 사건(?)으로 마음이 흩어져있던 그들은 나를 보고 "혹시 우도 사람 아니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래, 그렇게 말할 힘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그래도 살아있네'라며 홀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마음에 금이 간 친구들에게 따뜻한 흑돼지 한 접시(돼지야 미안하다..) 사주어야지하고 '밥부터 먹을까?'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두 친구 중 한 명이 빌렸던 스쿠터 열쇠를 꼽아 놓고 온 것이다. 결국 그는 우도 바다를 다시 건넜다가 돌아오는 수고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돌아와서 하는 말이 참 그 아이스럽다. "그래도 내가 이 중에서 우도 제일 많이 와봤어!" 고난 중 위트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힘이 있다.


#괴생명체, 인간의 호기심

 한 친구가 바다를 건너가 있는 사이, 남은 둘은 하수고동 해수욕장에 풍덩 들어갔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1인과, 수영 자부심만 가진 개헤엄 30초 수영자는 튜브에 대롱대롱 매달려 제주의 에메랄드 바다와 구름에 감탄 중이었다.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떠다니고 있었다.


"저거 뭐야?"

  "괴생명체다!"


 27살짜리들의 대화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순수한 대화로 시끌벅쩍한 우리는, 궁금함보다 무서움이 컸기에 슬금슬금 그 괴생명체(?)의 그림자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가진 청년 2명이 우리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 괴생명체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우리 못지않게 궁금한 듯해 보였다.


"이제 영화들이 이해가네."

  "무슨 말이야?"

"아니 왜, 영화 보면 꼭 괴물이 나오면 사람들이 피해야 되는데 호기심으로 다가가 보잖아."


인간이 가진 호기심은 그래서 때론 창조적이기도, 위협적이기도 하다.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본능적인 행동이다.

 

#밀려오더라도, 성을 쌓자

꽤나 열심히 만든 성벽

 수영(?)하다 지친 우리는 해변가에 앉았다. 그리고 누구랄 것 없이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친구는 벽을 쌓고, 나는 디자이너의 본능으로 그 위에 데코레이션을 했다. 세월을 품고 돌이 된 산호들과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라를 위에 올리니 우리의 성벽이 더욱 특별해졌다.


"아니, 어차피 바다 물이 들어오면 다 쓸려내려 가는데 왜 자꾸만 물이 맞닿는 그쪽에 성을 쌓는 거야?"

  "원래, 그게 모래성 쌓기의 묘미야."


 처음엔 조금 어이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본성과 '인생'이지 않을까 싶어 무릎을 탁 쳤다.

  밀려오는 것이 파도의 본질이고, 우리가 그러한 파도가 맞닿는 해변가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에 성벽을 쌓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썰물이 되어 물이 더 닿지 않고 성벽이 안전해지자, 굳-이 바다 쪽으로 자꾸만 성벽을 내는 것. 그러고 싶어 하는 것. 참 묘한 '인생'이다.



성산일출봉


#바이바이 마이디어-

 해가지기 전에 서쪽으로 넘어가야 하는 서쪽 나라 친구들과 우도에서 나와 함께 밥을 먹었다. 제주도에 왔으니 꼭 흑돼지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원을 풀기 위해 우리는 흑돼지가 있는 음식점에 갔다. 그래도 밥은 배불리 먹여 보내고 나니 오늘 하루 해야 할 가장 큰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이제야 다시 조용히 길을 걸을 힘이 났다.

성산일출봉에 오르기 전, 아직은 힘이 있을 때.


#고비, 위트

목적지보다 도착하는 것보다, 가다가 만나는 작은 꽃들이 좋다.

 오랜만이었다. 무언가를 '끄응-차' 견디고 해내는 경험이.

어느 때부턴가, 참 피곤한 청년 사회에서는 도전하고 견디는 것보다 소소한 행복을 찾고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기 때문에 혹은 그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도전적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나 또한 Take it easy~족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하루 종일 걸어서 아스라질 것 같은 이 다리를 부여잡고 성산 일출봉 쪽으로 향했을 때만 해도, 굳이 꼭대기까지 오를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가는 길에 보이는 꽃과 풀이 좋았을 뿐. 올라가면서도 중간에 돌아 내려갈까 몇 번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 높은 정상이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멈추고 싶었다.


도깨비도 나처럼 힘들었나보다.

 내가 아끼는 한 동생에겐 슬리퍼를 신고 10분에 뛰어올라갔다는 성산 일출봉 꼭대기가(그건 너니까 가능했던 걸 거야..) 내게는 3시간 같은 30분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고비가 올 때 나를 다시 걷게 한 것은 작은 야생초였다.  '도깨비고비' 혹시 나 말고도 숨이 벅찬 순간에 이 야생초 하나를 만난 등산객이 있을까. 이 피식-할만한 위트는(실제 이름이지만) 정상에 가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었다. 이래서 '인생'들엔 때때로 위트가 필요하다.


#매일 노을을 보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

'일출'의 자리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의 때

 성산'일출'봉이 일출봉이란 것은 잊었다. 어쩐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분화구 방향으론 기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에이 뭐야'하고 고개를 돌려 내려가려는 순간 그제야 알았다. 일출봉의 방향에 앉아선 일몰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내려가는 계단에 홀로 앉아 꽤 오랜 시간을 가만히 있었다. 알게 모르게 변하는 노을의 색이 무엇인가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매일 노을을 보는 인생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노을
산에 걸린 해처럼. 내 손에도 노을이 걸리길 바라는 집게집게, 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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