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시간을 찾아주는 소녀 이야기

미하엘 엔데 소설 / 모모

by 찬란한 기쁨주의자

금요일 늦은 오후,

커다란 창 너머로 햇살 속에 존재하는 느티나무와 책을 읽는 사람들이 보이는 곳, 지혜의 숲에 앉았다.


장난스럽게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제일 좋아!'라고 했지만 실제로 조금은 난데없이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행복한 순간일 테다. 그냥 시간이 아니라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래서 무언가를 해도 좋은 시간.

휴가를 내고 파주에 와서 사랑하는 이와 마주하고 읽는 책과 써내려가는 글은 더없이 완벽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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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


미하엘 엔데를 처음 만난 것은 혈기가 가장 왕성하던 중학생쯤이었다. 아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내게 최고의 책은 <망각의 정원>이었을 것이다. 상상하기 좋아하는 내게 이 책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듯 선명한 세계 그 자체였고, 이 책이 그의 유고작이란 데서 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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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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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커다란 도시에 모모라는 소녀가 등장한다. 모모는 '깔끔함과 단정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놀랄 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혼자 폐허 같은 돌무더기에 사는 모모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주로 가장 별것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모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했다. 서로 싸웠을 때나,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 슬프고 기쁜 일이 있을 때 모모에게 찾아갔고, 모모는 가진 커다란 능력과 재산인 '충분한 시간'과 '들어주기'로 마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행복했고, 그 마을엔 입버릇처럼 '아무튼 모모에게 가보게!'라는 관용어처럼 자리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간은행의 영업사원으로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돌보느라 보내는 시간,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느라 보내는 시간 때문에 그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설득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아끼고 또 아끼고... 무언가를 성취하고 끝없이 이루어 내는 삶을 선전했다. 도시의 사람들은 하나 둘 변해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그들은 모모를 잊었다. 모모에게 찾아오는 시간까지 '시간 없다'라고 여긴 사람들은 회색빛으로 변해갔고 자신의 빛을 잃어갔다.


모모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에 알게 되고 똘똘 뭉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모모의 가장 가까운 두 친구인 기기와 베포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모와 함께 상상놀이를 하며 놀던 어린아이들이었다. 회색 신사, 시간을 뺒는 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유일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아이들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어른들에게 시간에 대한 의미를 알리기 전에 어른들을 더 바쁘게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유익'이 되는 탁아소를 만들어 그곳에 아이들을 다 가둬버렸다.


이제 시간을 뺏는 자들의 유일한 위협은 모모와 시간을 나누어 주는 시작점인 호라 박사뿐이었다. 그 둘이 만나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결국 모모는 느리게 걸어 가장 정확하게 길을 갈 수 있었던 거북 카시오페아를 따라 호라 박사를 만나게 되고, 시간의 비밀을 알게 된다. 미래와 과거 현재의 수수께끼를 알고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모모는 죽음을 무릅쓰고 회색 신사들에 맞서 회색 그들을 도시에서 사라지게 하고 도시는 다시 평화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거리에는 어울려 노는 아이들이 넘쳐나고 사라들이 서서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일을 하러 가던 사람도 창가에 놓인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새에게 모이를 줄 시간을 낸다. 의사들은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돌보고 노동자들은 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편하게 일을 한다.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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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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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나누어 주는 호라 박사를 만난 모모는 묻는다. "시간 도둑들이 사람들한테서 더 이상 시간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조정하실 수 없나요?" 호라 박사는 대답한다. "그럴 순 없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나는 나름 주위에서 '시간관리'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대학생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시간관리에 대한 강의도 꽤 해왔다. 사람들이 내게 그러한 것을 요청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내가 '많은 것을 제때에 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부도 하는데 대외활동으로 스펙도 쌓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데 알바도 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 것 같은데 여행도 잘 다니고.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시간을 잘 사용한다고 여긴다.


상황이나 요청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 관리법'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내가 더 강조하는 것은 시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인데, 쓰는 시간과 얻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간 속에 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이 주어진다. 물론 태어난 법/경제/사회적 환경에 따라 이 시간조차도 공평하진 않을 수 있다. (누군가는 노동에 인생의 대부부를 써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에게 시간은 주어진다. 호라 박사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지킬지, 쓸지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그 시간 속에 정체성 없이 존재해버린다면 그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죽은 시간이 된다. (책에선 회색 신사들이 사람들을 바쁘게 더 바쁘게 하여 죽은 시간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빼앗는다.)


이 책이 쓰일 때와 지금의 시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업사회와 자본주의가 막 전 세계 사람들을 집어삼키던 시대가 아닌 인간보다 빠른 AI의 시대이다. 많은 일들을 기계가 대체하고 있고 인간은 '자신만의 시간'을 훨씬 더 확보하고 있다. 사고방식의 변화도 컸다. 적어도 우리나라만 보아도 그렇다. 20-30대를 주축으로 흐르고 있는 주된 흐름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이다. 과도한 노동에 저항하고 축적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며 자유로워졌다. (물론 이조차도 일부의 이야기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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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미하엘 엔데가 '시간'에 대한 책을 썼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의 많은 것을 대체하고 있는 AI는 모모에게 던져졌던 완벽한 인형과 같다. 그렇게 회색 신사들이 던진 신무기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간 재산이 갑자기 늘어난 인간들은 애석하게도 그 시간 속에 자아가 존재하는 법, 모모와 같은 친구와 함께 존재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넘쳐나는 시간 속에 혼자된 인간들은 스스로를 잃었고, 결국 또다시 죽은 시간을 만들어 회색 신사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잃고 있다.


아아, 이 시대에 모모가 필요하다.
아무튼 다시 모모한테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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