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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Jul 01. 2019

2019년, 7월을 다시 살아갈 힘

<오늘의 사색 다섯잔>  10분으로 얻은 반년에 대하여

쓰기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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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내가 했던 글쓰기+캘리그래피 강의의 이름은 ‘읽고 쓰는 삶에 관하여’였다. 나는 입버릇처럼 읽는 것과 쓰는 것이 하나고, 쓰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라고 말하곤 한다. 쓰는 듯이 살고 사는 듯이 써가는 것, 쓰는 것과 사는 것의 경계가 없고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내 주변에는 쓰게 만드는 사람이 많다. 그리하여 나는 기어이 살게 만드는 쓰기를 하게 된다.


이번 글은 책을 도통 사서 읽은 적이 없는데 내 책은 왠지 사고 싶었다며 주문을 넣은 L과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을 다정하게 걱정하며 처방전_팥빵을 내민 P에게 드린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혜


우리 집은 배산+임언덕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곳의 꼭대기다. 두 다리가 성한 나도 긴 경사길을 오를 때면 어김없이 가뿐 숨을 몰아쉬곤 한다.


2019년 반이 지나고 또 반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7월의 첫날, 그것도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아침만 되면 하루를 살아갈 기대와 새 힘이 불끈 나는 내가, 오늘은 무려 반_새해의 시작에도 동이 터도 울지 않고 졸아대는 노계마냥 히말떼기가 없었다.(*히말떼기: 힘의 광주 사투리) 


8시간 반이나 자도 에너지가 돌지 않은 돌연변이 몸뚱아리를 일으켜 겨우겨우 집 밖을 나왔다. 주인은 쉬지 못하나 밥은 홀로 잘 쉬어 있던 탓에 아침을 거르고 나오니 평소보다 10분 정도가 빨랐다. 쭉 펼쳐진 경사길을 내려가는데 자기 몸보다 두세 배는 큰 리어카에 종이와 책 같은 것들을 잔뜩 싣고 할머니 한분이 가다 쉬다 하셨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몇 걸음 앞서 갔지만 이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저이를 돕지 않을 이유를 얄팍하게 찾고 있는 것이다. ‘어 할머니가 멈추시네? 저기가 이제 집인가 보다. 아이 도와 드리려고 했는데 끝나버렸네.’라는 수를 쓰고 있을 때 가려진 차 뒤쪽에서 다시 할머니가 나오셨다.


그때 내가 듣고 있던 노래는 내 뒤통수를 (조금 거칠게 말해) 후려쳤다. ‘예수 우리의 치료자, 주는 온 땅에 빛이 되시네.’

내가 믿는 절대자는 온 땅에 빛이 된다고 노래하는데 마음이 가난하고 어깨가 찌뿌둥한 나는 그렇게 한 대 읃어 맞고야 가던 몸을 돌려 할머니께 다가갔다.


“할머니 혹시 여기 아래로 쭉 내려가세요? 저도 여기로 가는데 제가 대신 끌어 드릴게요!”

“아이구우.. 힘들 텐데 그냥 그럼 뒤에서 좀 만 밀어줘요.”

그렇게 뒤를 맡게 된 나는 이내 양 날개 쪽으로 포지션을 바꾸어 캄보디아 농사일 이후로 곤히 자던 근육을 깨워 불렀다.


차가 뒤에서 오면 멈추어 옆으로 비키고 다시 가다 쉬기를 반복하며 겨우 길 아래까지 내려왔다. 할머니께 어제 예배 때 받은 사탕 주머니를 드렸다.

“아니 뭘 이것까지 줘요..”

“할머니 저 이제 가볼게요!”

“아이구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버스 역으로 오는 몇 걸음 동안 눈물이 났다. 7월이 되어도 나지 않았던 생동감의 근원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단 십여분의 힘으로 2019년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꽤 남는 장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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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보니 아까 그 할머니께서 차가 가는 길 옆에서 리어카를 끌고 계셨다. 차도에서 폐지를 이고 끌고 가는 어르신들을 보행자나 운전자나 반길 턱이 없다. 실제로 모두에게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혜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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