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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Oct 31. 2019

존재의 기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3일차

DAY 2


8시간 정도를 자니 눈이 저절로 뜨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둘째 날이 시작되었고, 어제 사진들을 보며 내려오는 애교머리가 거슬렸던 나는 프론트에 가위를 빌려 앞머리를 밀어버리다 언니에게 걸려 영상이 찍혔다.


아침 짐을 챙기며 같은 방을 쓴 L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어제부터 간단한 인사를 나눈 사이라-) 오늘은 어딜가냐는 대화를 하던 중 언니와 내가 가려는 곳 (어제 길가다가 그냥 꽂힌 곳이라고 소개한-)에 솔깃해하길래 냉큼 “같이 아침 드실래요?” 여행지에서 꽤나 던져본 그 시답잖은 멘트를 던져보았다.


/이상한 언니 둘

패션을 전공한 그녀와 브런치를 먹으며 살아온 삶과 요즘의 고민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그녀가 교회를 다녔으나 현재는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다닐 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수많은 확률을 뚫고 온 특별한 인연이다. 오늘 우리의 대화가 서로의 다음에 무언가를 싹 틔울 수 있길 고대해 본다. 오늘의 캘리그라피는 그녀에게!


/미술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국립미술관

16-19세기 러시아 그림은 그리스 로마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인체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면서도 선처리 등은 빛에 의해 몽환적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국립미술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8월의 카펫>. 

대학교 교양으로 미학 수업을 들었을 적 교수님이 한 말이 나를 여행지만 가면 미술관에 다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미학이란 우리가 그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해내지 못하더라도 보는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축제의 감정이라는 것. 러시아 찬바람, 8월의 카펫 위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감정을 느끼며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한 작품 옆에 별도로 긴 점자가 적혀있었다. 다분히 시각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관 안에 점자로 표현된 회화가 머리를 때렸다. 아아 나는 여전히 얼마나 읽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인가.


/현대미술관

사람들이 지나칠까 봐 'EXHIBITION'을 아주 크게 걸어 놓은 곳. 다행히 지나치지 않은 참새 두 마리가 들어갔다. 러시아 인형극이나 극에 사용되는 코스튬들이 있었는데, 볼셰비키 혁명을 중요시하는 이 나라는 그 혁명으로 무찌른 황실에 대해 풍자하는 듯한 느낌의 스토리나 의상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니콜라이 개선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라이 개선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정교회 성당, 꺼지지 않는 불(영원의 불)

니콜라이 개선문에서 셀카봉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언덕을 조금 내려가 꺼지지 않는 불 옆에 앉았다. 소비에트 연방 국가였던 곳에 종종 있다고 하는 저 불. 문득 이 세상 꺼지지 않는 불이란 게 있을까-란 사색에 잠기다가 우리나라 6.25 전쟁의 비극을 다룬 연극을 봤던 기억이 났다. 배우가 한 대사 중에, 어제는 공산당이 영원할 것 같았고, 오늘은 민주주의가 영원할 것 같았다고 말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오로지 살기 위해 또 살리기 위해서 어제는 이 사람들의 밥을 해주고 오늘은 이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고. 영원할 것 없는 것들 속에 -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여전히 누구일까


/어디서나 불러야 할 노래

나는 물을 보면 노래하는 습관이 있다. 특히 여행지의 호수, 강, 바다 앞에선 어김없이 노래를 부른다.

믿음 다하여 그 위에 서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으리
믿음 다하여 그 나라 세워가리라
주님 곧 오실 때까지


/사랑에 관하여

오늘의 나눔 주제는 사랑이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끊이지 않은 우리의 대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식, 도덕성과 도덕주의....


우리는 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무관심할까.

내가 다녀왔던 필리핀의 쓰레기산과 베트남에 버려진 아기 이야기

언니가 만난 상도동 노숙자 이야기

언니는 내게 내가 그런 것을 보고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고 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보이는 것만 보이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이야기만으로 울먹거리는 우리가 사랑스러운 날이었다.


/카페에서 요한123서 묵상

언니는 내게 물었다. (이 언니 참 질문을 좋아한다. 그리고 좋은 질문을 던지는데 선수다!) "맨날 서로 사랑하라는데 진짜 사랑이 뭘까, 어디까지 사랑해야 사랑일까. 내가 눈 앞의 너를, 나와 상관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데 지금 저 창밖의 러시아 사람은?" 언니는 왠지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질문을 물어왔다.


나는 내가 받은 선물을 자랑했다. 나는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오늘 아침에 만난 그 L씨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언니랑 여행 다니는 것도 이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매일 자랑하고 싶을 만큼 행복하고 저 창 밖의 러시아 아이들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언가 마음이 벅차올라질 만큼 좋다고, 논리적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이 땅의 풀과 나무도 새도 사람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에 돌아가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책을 다시 집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_ 소유냐 존재냐 중



/돕는 인간들

나는 꽤 길을 잘 찾고 특히 여행 나오면 죽어 있단 직관의 감각들이 살아난다. 언니는 길 눈이 어두운 편이라고 했다. 구글이 알려주지 않는 길은 나의 감각으로, 그러나 대부분은 언니의 스마트한 손 안에서 우리의 일정이 이루어진다.


여행에 나오면 돈 계산이나 기계 이용 등에 꼼꼼하지 못하다. 이번 여행에서 아주 꼼꼼하고 스마트한 언니 덕에 더 맘 놓고 어리 벙벙하게 다니는 중이다. 그렇게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주는 쿵짝 진지자매


/횡단열차

러시아 횡단 열차 컵라면 뿌시기

드디어 탄 열차. 오늘 아침부터 이 열차를 탈 생각에 우리 둘 다 들떠있었다.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봐왔고 우리 칸에 도착하니 엥? 웬 커플이 있었다. 분명 내가 여성 전용칸 예약 했는데?


배웅을 해준 것 같은 여자 친구는 가고 남자분 혼자 남았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 후 1층 자리 테이블에서 라면, 삼각김밥을 먹었다. 음식을 먹으며(티브이에서 본 로망처럼 나누어 먹지는 못했다! 거절당해 시무룩한 우리..) 어디 나라에서 왔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디가 젤 예뻤고 이 기차는 왜 탔는지 담소를 나누다 우리 칸인 2층 침대로 기어 올라왔다.


/횡단 열차 101

얼마 가다가 아래 자리에 비어 있던 한 칸에 러시아 어머니가 들어왔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이야기 하시는데, 우리의 러시아 청년은 다정하게도 참 잘 들어준다. 한참을 달리다 언니도 나도 하루를 갈무리하는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아래칸에서 어머니가 갑자기 러시아 민요?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아니?!!)

우리는 금세 그 문화에 적응했고 질세라 '밤이나 낮이나'라는 노래를 어머니 목소리보다는 2배쯤 작은 소리로 불렀다. 언니는 아예 생수병 마이크를 잡고 부르고 있는데, 어머니가 노래를 다 부르고난 뒤, 우리에게 "조금 더 크게 불러봐! 같이 듣게!"라고 말하셨다.(는 내 추측) 잠들기 전까지 웃음이 가득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내일이 기대된다. 굳 횡단 열차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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