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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Oct 26. 2019

밀려오는 것을 바라볼 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2일 차

DAY1

#달리는 택시 안에서

전 세계 어디에서도 해 뜨면 눈뜨는 인간인 김모씨는 회색빛 러시아 태양에도 어김없이 이른 눈을 떴다. 국경 없이 터진 비염과 함께.


체크아웃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막심 택시(*러시아 카카오 택시) 불러 다음 숙소이자 오늘 우리의 놀이터인 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무표정의 택시 운전사님을 만나 시속 140으로 이동을 하는데, 갑자기 기사님께서 러시아어로 말을 거셨다.(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 우리가 러시아말 못 한다고 하니까 바로 구글 번역기로 말을 녹음해 보여주셨는데, 번역기가 예쁜 문장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원어민 H언니는 키르기스스탄에 1년 살았던 순발력으로 그것이 용케 날씨 이야기인 것을 알아듣고 첫 small talk가 성사 되었다.


#온리로컬

러시아에서의 첫 식사는 길가다 ‘옹’으로 보이는 간판에 꽂혀 들어가게 된 곳이었다. 원하는 음식들을 골라 담아와 계산하는 뷔페식이었고, 한국인 없는 데가 없는 아르바트 거리였는데도 한국인을 비롯해 외국인 자체가 없는 진짜배기 현지 식당이었다. 우리도 마치 다 아는 듯한 표정으로 음식을 골라 담았고 익숙한 듯 새로운 맛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호호은지씨의 소소한 기쁨

신기한 음료수

나는 호-불호가 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호가 확실하고 호가 다양한 편이다. 나는 갖가지 음료들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그 나라에서만 있는 특이한 음료들을 먹어보는 걸 엄청나게 좋아한다. 바다에 앉아 먹을 소소한 쇼핑을 마치고 호호한 은지 씨와 그런 은지 씨를 바라보는 H언니의 시선이 담긴 사진.


솜사탕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놀이공원

솜사탕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설탕과 색소로만 이루어진 솜사탕이 나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오로지 다른 공기 속에 있을 때 뿐이다. 이런 상황에선 평소에 하지 않을 것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혀 끝과 눈 앞의 강렬한 색감으로도 느끼고 싶어한다. 내 손 끝의 솜사탕을 녹아 내리게 한 것은 시베리아 바람이 아닌 블라디보스토크 바다 위의 햇살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놀이고원


#밀려오는 것을 바라볼 때

해양공원 벤치에 앉아 요한일서를 읽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우리는 요한일, 이, 삼서를 읽고 나누기로 했고 밀려오는 바다와 낯선 공기 아래서 나의 사랑하는 책을 펼쳤다.

배-비둘기-임-바다(배산임수)에 둘러싸여 행복한 묵상을 마친 후 나눈 것은 ‘서로사귐’에 대한 것이었다. 내게 여행은 진짜 집중해야 할 것들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한 극약처방이며, 때가 켜켜이 쌓여 숨 쉬지 못하던 모든 감각들을 깨우는 다정한 방법이다. 마주치는 모든 것 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그동안 사귀지 못했던,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곳 들에 안부를 묻는 ‘서로 사귐’의 때이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문장 하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찬 바다 위로 밀려왔다. 

그래 알겠어, 돌아가면 오래도록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널 기억하고 기록할게.


H언니는 '무릎 꿇고 세상을 흉내 내지 마라'는 토저의 말을 나눠주었다. 그녀의 한마디는 내가 무엇을 흉내내고 살아야할 지 묵직하게 던지는 듯 했다.


캘리버스킹

이번 여행 때 하고 있는 개인적인 소소한 프로젝트는 캘리버스킹이다. 하루에 하나씩 마음에 떠오른 문구를 써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선물하는 인생은 즐겁고, 나는 이 곳에 좋은 영양분을 흩뿌리고 가기로 했으니까. (이쯤 하면 다시 나올 퇴.비여행)


#아르셰니예프 향토박물관

블라디보스토크 아르셰니예프 향토박물관

어딜 가든 가장 그 동네스런 것에 관심이 많은 나는 박물관, 미술관을 꼭 가보려 한다. 행복하게도 오늘 H투어에도 향토박물관 일정이 있었다.(우리는 각자가 일정을 나누어 맡았다.) 일부러 가지 않으면 지나칠 것 같은 이 곳에선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발해에 관한 특별 전시전이 진행 중이었다.


한국어와 영어 브로셔 내용을 살피며 과연 이 내용은 발해를 또 어디의 것으로 말하려는 수작인지 눈에 쌍심지를 켰으나 다행히 그런 분위기는 아니 였던 듯하다. 조금 누그러진 마음으로 전시관을 살폈다.


호호은지씨의 취향 대방출 2탄!

나는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한국에서 여행을 다닐 때도 지역에 박물관을 꼭 가보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시대와 지역별로 보이는 기와의 모양, 막새와 수막새, 치미의 선과 문양에 매력을 느낀다. 고구려 신라 백제 모두 막새에 새겨진 모양의 미묘한 차이로 삼국을 구별했는데, 처마 끝까지 디자인하는 섬세함이 좋다. (글을 쓰다보니 호호은지씨의 진면모를 다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위층이 올라가 이 지역에 살았던 참으로 다양한 민족과 역사를 보았다. 전쟁, 볼셰비키혁명, 레닌, 스탈린, 강제이주. 언니와 박물관을 찬찬히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얕고 넓어 즐거운 우리의 대화들.


#광장의 의미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

레닌 동상이 우뚝 서있고, 소련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광장. 요즘 이 곳의 주말엔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다. 과거엔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할 때 모여졌던 곳이기도 하다.


빈 공간, 여전히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렇게 채워진 무언가는 또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 서울의 대표적 광장이라면 한국의 역사를 새로이 써갔던 광화문을 떠올릴 것 같다. 여전히 그곳엔 다양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외침들이 존재한다.


나에게 작은 빈 공간이라고 한다면, 살고 있는 내 방, 운영하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공간인 기쁨곡간, 관계 맺고 있는 곁들 그리고 내 마음 정도라 하겠다. 나에게 주어진 이 '공간'들에 무엇을 채우며 살아가는가가 하루하루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채우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나누고 흘려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채움이기에 무엇이 쌓이는 지와 더불어 빨리 곡간을 비워내는 회전율 또한 놓치지 않고 신경써야 한다.


#밤공기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아르바트 거리에 해가 졌다. 이곳은 해가 지면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오히려 하늘이 더욱 파랗게 물든다. 해가 진다는 것과 어둠이 온다는 것을 동일시하게 되는 생각은 위도 32~43에 갇힌 생각이었나 잠시 파란 어둠아래 서 있어 보았다.

#사람책

아침은 '나의 사랑하는 책'으로, 하루의 마무리는 '사람책'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 어땠는지 혹은 대화를 하다 기어코 꼬리를 물어버리는 그 흥미로운 여러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담이지만 실제 덴마크나 북유럽에선 도서관에서 사람책을 대여 할 수 있다고도 한다!) 같은 상황 같은 걸음 걸이 속에도 다른 시선과 다른 사색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사실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지. 따뜻한 커피와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먹는 (이름을 까먹은) 디저트와 함께 사람책 H언니를 읽으며 노곤한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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