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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기쁨주의자 Jun 29. 2022

조혈모세포를 기증한다고?

<피를 나누어 드립니다> 나의 특별한 조혈모세포 기증 일기

2022년 6월 16일 목요일 아침

<8년만에, 2만분의 1확률로 걸려 온 전화>


대출, 광고, 카드회사, 보이스피싱 등... 달갑지 않은 전화가 하루의 안부처럼 걸려오는 요즘. 070이나 02로 시작하는 전화는 잘 받지 않는 편이다. 여느 때처럼 폭풍 같은 오전 근무를 하다 02-로 시작하는 전화가 왔고 얼떨결에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000님,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입니다."

-  "네?"

"2014년에 조혈모세포 기증 사인을 해주셨죠?"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3초 정도 의심했다.)

-   "아아 네네! 맞아요! 대학교 때"

"조혈모세포 맞는 분이 나타나서 기증을 하실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후 통화로 한참 조혈모세포 기증에 대한 안내를 듣고 카톡으로 관련 자료를 받았다.

한국 조혈모세포 은행에서 받은 안내 카톡
* 조혈모세포
: 피를 만드는 어머니 세포란 뜻으로 이 세포가 자라고 증식하여 혈액 내의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그리고 각종 면역세포를 만들게 됩니다. 각종 혈액질환은 이러한 조혈 과정 중에 발생한 성장장애나 암세포로의 변화 등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혈모세포 이식이란 무엇인가? (국가 건강정보 포털 건강칼럼)

조혈모세포는 가족이 아닌 경우 일치할 확률이 2만 분의 1이라고 한다. 백혈병이나 난치성 혈액암, 기타 혈액질환을 앓고 계시는 환자 분께서는 가족에게 기증을 받을 환경이 안되셨기 때문에(기증할 가족이 없거나, 가족의 건강상태가 안 좋거나 등) 비혈연 기증자를 찾았을 테고, 무려 8년 만에 0.00005%의 확률로 내가 나타난 것이다!


우선 간단히,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 조혈모세포 기증 과정을 살펴보니-

00. 나를 담당하는 코디네이터가 있다.

조혈모세포 기증 절차가 생각보다 길고 복잡해서 관련 과정을 안내하고 챙겨주시는 코디네이터 분이 계시다. 또 법적으로 기증자와 환자 간의 정보 공유나 접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중간자이기도 하다.

01. 기증 최종 확정

큰 수술이 아니라 서면 사인을 받진 않지만, 작은 일은 아니기 때문에 가족 동의를 얻어야 한다. 또 기증자의 기증 의사 확정이 되고, 이식 2주 전부터 환자 측도 관련한 치료(고강도 방사능 치료와 항암요법 등이라고 들었다.)를 들어가기 때문에 중도에 취소했을 경우, "환자분 건강에 크게 무리가 가고 사망하실 수도 있어요."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듣게된다.

02. 유전자 확인검사

처음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로 등록 시 분석되었던 유전자형이 완전히 환자와 일치하는지 다시 검사한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약 2~4주가 소용되고 그 이후 헌혈, 한약, 과도한 음주, 흡연, 약물 복용 등을 자제해야 한다. 나는 음주도 흡연도 건강 보충제를 제외하고 따로 먹는 약도 없으니 어렵지 않을 것 같다만, 카페인이나 탄산 같은 것들도 건강상태를 위해 줄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어휴

03. 건강검진

기증 일정 한 달 전, 조혈모 세포 기증 병원에 방문해 건강검진을 받게 된다. 코디네이터분이 말해 주신 건데, 본인에게 편한 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해당 병원의 진료나 입원 일정이 가능한 선에서) X-ray, 심전도,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을 한다.
04. 조혈모세포 성장인자 주사

기증 3~5일 전부터 오후에 한 번씩 양쪽 팔뚝에 주사를 맞는다.(골수에서 말초혈로의 조혈모세포 방출 촉진) 이때 쇼크, 호흡 등 부작용이 있을 경우 기증이 중단될 수 있다. 그 외 그냥 설명해주신 부작용이라면(희박한 확률로 나타날 것들 제외) 두통과 피로 그리고 불면증이 있다. 원래 하루의 필요를 꽉 채워 피로하게 집에 돌아와 눕자마자 잘 자는 나에게도 이런 증상이 과연 나타날는지.

05. 입원(2박 3일)

오후 4~5시쯤 입원한 후, 그다음 날 헌혈실에서 조혈모세포를 기증한다. 약 4~6시간 동안 피를 뽑고 그 속에서 조혈모세포를 빼낸 뒤, 다시 나에게 넣어주는 방식이다. 다만, 가벼운 혈소판이 딸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기증 이후 멍이 잘 들고, 지혈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 친구들은 그렇게 긴 시간 피를 뽑는 다는 것에 대해, 혹 팔에서 채혈이 잘 안되면 목 아래에 혈관을 삽입해야한다는 어느 블로그의 후기가 몹시 걱정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입원 자체가 더 곤욕이다. 하얗고 깨끗한 곳에서 푹 쉰다고 생각해야지. 책은 뭐 들고 가야하나~~?

06. 퇴원 후 건강 관리

조혈모세포는 3~4주가 지나면 자연 재생이 된다는데, 인간의 몸은 정말 신비롭다. 이렇게나 생산적이고 효율적일까. 조혈모세포 채취 후에는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무리한 팔운동을 하지 않아야 하고, 혈액수치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피곤함, 어지러움, 체력 저하 등이 있을 수 있다.

+환자가 이식 후 조혈모세포 생착이 불완전하거나 재발한 경우, 다시 시행한다고!



2022년 6월 17일 금요일

<내게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대에겐 사는 문제라면>


연락을 받은 후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고민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가족의 동의는 잘 설득하면 될 것 같았고(물론 엄마의 표정이 보이긴 한다.) 회사와의 일정 조율은(법규상 이런 유의 기증에 관련해 유급휴가를 주도록 권고하지만) 잘 안되면 내 휴가를 쓰면 될 일이었다.


내가 기증자가 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격을 꾹꾹 눌러 담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주변 지인들에게 연락이 왔다. 조혈모세포 기증에 관한 각종 링크들과 함께.


"(걱정 가득한 얼굴로) 너 진짜 이거 할 거야? 괜찮아? 대단하다.."

"와 나도 기증 사인해놨었는데, 연락 안 오던데? 신기하다!"

....

"근데 왜 하는 거야?"


평소에도 소문난 저혈압과 저체력자로 철분제까지 먹는 네가 그런 기증이 가능하냐 걱정해주시고, 나보다 더 철저하게 자료를 찾아 같이 공부해 주는 지인들이라니! 이 정도 사랑을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 작은 몸에 담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흐르는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나에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지만, 나를 8년 만에 찾아낸 환자분께는 말 그대로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이니까. 내게는 앞 뒤로 몇 주 피로하거나 조심하며 될 일이고 하나님께서 지은 기적의 몸은 모세포를 나누어 주고도 자연 회복이 되니 말이다.



2022년 6월 18일

<철부지 딸과 한 가족의 근심>


마침 한 달에 한 번 광주 집에 내려가는 날이었다.
"언니, 나.."
우리 가족에서 가장 똑 부러지는 언니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당황하고 놀라는 언니에게 미리 숙지한 정보들을 차근히 설명하며 그렇게 위험한 일이 아니고, 얼마나 귀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이야기했다.


"아빠, 나.."

아빠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내가 캄보디아에 반년 봉사하러 간다고 통보한 배은망덕한 때도 엄마에게 "쟈는 사막에 떨궈놔도 전갈을 잡아먹고 살 앤께는 걱정 마쇼!"라고 했으니까.


"엄마, 나.."

엄마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온갖 걱정과 근심이 머리끝에서 목을 타고 심장으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면 과장이려나. 다행히 미리 설득해 놓은(?) 언니가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었다.

"엄마, 나도 얼마나 이런 거 조심스럽고 꼼꼼한지 알지? 근데 내가 찾아보니까 그렇게 위험한 거 아니고 엄청 희박한 확률로 일치한 거래. 또 사람 살릴 수 있다고 하니까!"

짧은 시간 엄마의 한숨 가득한 핀잔을 듣다 결국, "앞으로 이런 중요한 결정은 꼭 먼저 이야기를 하고 상의해주렴. 네가 혼자 서울에 떨어져 사니까 엄마는 더 걱정이 많아 늘...."


1박 2일에 걸친 설득 끝에 순조로이 가족 동의를 얻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 속에서 자라나왔는지 감사하게 된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생명을 위해 함께 마음을 가다듬는 우리라니! 코디네이터님께 월요일에 바로 말씀드려야지 후헤헤 신난다.



2022년 6월 20일~25일

<이왕 기증할 거, 좀 건강하게>


기증 확정 후, 중간중간 코디네이터님과 건강에 관한 몇 가지를 확인했다. 내가 지난 건강검진 때 혈압 수치와 심박동 수가 너무 낮게 나왔고 기립성 저혈압이 심해 철분제를(처방받지 않은 영양제) 먹고 있다고 했더니 혹 3일간 연속으로 병원에 가서 혈압 수치를 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최근 회사 일이 좀 바빠서 중간에 나갈 여유가 없을 것 같다고 했더니 집으로 손목 혈압계를 보내 주셨다.


손목에 착-감기는 애플 워치는 아니지만(훨씬 정확하겠지?) 세상 참 좋아졌단 생각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쟀다. 감사하게도 작년보다는 수치가 좋게 나오는 것 같았다. 코디네이터 분도 3일 치의 수치를 보시더니, 무리 없이 기증 가능할 것 같다고 해주셨다. 조혈모세포 기증을 계기로 내 건강상태를 더 확인하고 조심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좋은 것 같기도?

조혈모세포기증협회에서 전달 받은(그리고 반납 할) 손목 혈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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