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공간, 주인장. 서점의 매력은 무엇일까?
2023년 기준 전국 독립서점은 884곳으로 전년 대비 약 8.5% 증가했다고 한다. (출. 동네서점 트렌드)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전국 독립서점의 증감추세만 보자면, 서점은 분명 '사양 산업'이 아니다. 꼭 '텍스트 힙'의 트렌디함을 빌리지 않더라도, E-Book 시장이 커지더라도, 숏폼과 도파민에 절여진 뇌가 집중력이 빼앗기더라도, 종이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들이 모이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서점을 열 생각을 하기 훨씬 전부터 온갖 서점을 다녔다. 심지어 국내든 해외든 어떤 여행지를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까운 서점이나 북카페 위치를 찾아 지도에 저장하는 것이다. 한글이나 영어로 된 책이 없어 단 한자도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의 향현이라 할지라도 나는 서점이 주는, 서점만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기가 좋았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자. 진정한 책 덕후, 서점 덕후인 나는 어떤 이유로 그 서점을 선택했을까? 어떤 경우에 책을 사고 나왔고(어지간하면 한 권이라도 사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곳은 두 번 세 번 방문했을까?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최적의 고관여 타깃이라 생각하고 끌리는 무언가가 있는 서점의 특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책 큐레이션 취향이야말로 정말 주관적인 영역인 것 같다. 최근 갔던 서점 중 '아 여기 나랑 취향 진짜 비슷한데?'라고 생각했던 곳은 서촌에 있는 '책방 오늘'이었다. 한강 작가님의 책방인 줄은 나중에 알았지만...
책방 오늘의 큐레이션이 좋았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특정 분야에서 핏이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철학 영역에서 사고 싶었던 책이 정말 많았는데, 철학자 레비나스와 한나 아렌트의 책이 몰려 있는 책장 한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레비나스와의 대화'라는 책을 건졌다. 그 외에도 주목할만한 제목의 시와 시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
사회/철학이나 시는 비교적 에세이나 소설에 비해 비주류라고 인식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또 확고한 취향과 큐레이션의 깊이(주관적인 평가이지만)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 Tip. 특정한 영역으로 큐레이션을 하려고 한다면, 대중적으로 유행할 것보다 자신이 정말 자신 있는 분야를 선택하는 편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호응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지역서점의 문화 프로그램 운영은 필수가 되었다. 지난 정부에서 지역 서점 지원 사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더 이상 서점을 '책 구매처'로만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점은 지역에서,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하나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책 외에도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커뮤니티와 이를 운영하는 호스트인 서점 주인의 매력이 중요해졌다.
'끝남동'으로 불리기도 하는 연남동 끝자락에 '리댁션'이라는 서점이 있다. 서점 주인인 수련님은 서점 오픈 전부터 유튜브나 인스타를 통해 책을 추천해 왔고 어느 정도의 팬층이 있었다. 책을 읽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서점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다양한 모임들을 기획해 오픈하고 있다.
소셜 디벨로퍼(사회적 가치를 지닌 부동산 디벨로퍼) '아이부키' 회사에서 운영하는 장안생활이란 청년주택이 있다. 그리고 그 건물의 2층엔 뒷문이 장안생활의 생활자들의 공간과 이어지는 '무아레 서점'이 있다. 보유하고 있는 책 권수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1500권 정도는 될 것 같다.) 책 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책과 집을 매개로 한 다양한 모임을 꾸준히 운영한다.
서울의 문학살롱 '초고'는 인스타그램 릴스로 우연히 보게 되었고,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망설임 없이 저장해 둔 곳이다. '여긴 꼭 책덕후 친구랑 가봐야 해!'
서점에서는 이렇게 문학작품에 맞춰 주인장이 개발한 '문학 칵테일'을 판매하고 있다. 내가 만약에 이 공간을 간다면 원래 좋아했거나 읽어봤던 책 이름의 칵테일을 고르거나, 아니면 칵테일을 고른 뒤 그 책을 사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읽어보고 싶을 것 같다. 적당히 낮은 조도의 공간 분위기도 문학과 칵테일이 어울리는 곳이다. 이처럼 최근 몇몇 서점이나 북카페에서는 맥주 혹은 와인 등과 책을 페어링해 제공해 책은 거들뿐, 공간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판매하고 있다.
남편과 제주도 워케이션을 갔을 때, 역시나 지도를 켜 서점이나 북카페를 찾았다. 동네 이름인 '고산리'가 들어가는 공간이 마음에 들었고 네이버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2시간 예약제로 프라이빗 공간을 이용할 수 있었다.
2시간 동안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분리된 공간(한 층에 3칸 정도의 자리가 있다.), 보온병에 담겨 나오는 아이스커피와 당 폭발하는 크럼블(메뉴는 다른 조합으로 선택 가능),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헤드셋, 큐레이션 된 몇 권의 책,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남긴 흔적 등. 아마 고산리를 가는데 이곳을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사업 역시 디지털의 힘을 빌린다. 한 곳에 머물러 지나는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서점은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렵고 열심히 콘텐츠를 만들어 새로 입고된 책들도 알리고, 서점에서 진행될 북토크도 홍보한다. 서점 공간에 직접 방문해 읽고 싶은 책을 구매하기까지 한번 더 중간 단계를 주는 것이다.
일방향적인 홍보뿐만 아니라, 이미 진행된 프로그램의 후기를 올리는 것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이 서점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또 서점 주인이 직접 추천하는 책들을 통해서 서점에 큐레이션 돼있을 책들의 취향을 미리 알아볼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블라인드 북, 구독 모델 도입, 굿즈 판매, 도서관/학교 납품, 콜라보 등 서점이 자신의 효용가치와 매력을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것에 더 집중하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점을 준비하는 이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서점의 경쟁상대는 다른 서점이 아니다. 클릭 한 번이면 집 앞으로 빠르게 도착할 온라인 구매 보다 왜 이 공간에 직접 오고 싶은지, 빠르고 정확한 검지 슬라이드로 볼 수 있는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왜 텍스트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책을 읽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