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란한 기쁨주의자 Mar 02. 2018

들리는 것과 들으려는 것의 차이

#단양여행 사색길 2_우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어디 안가세요?”


굳이 멀리 단양까지 여행을 와서 패러글라이딩도 안하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손으로 열심히 끄적이는 우리들이 신기했는지, 게스트하우스 주인 분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사실 우리가 묵은 곳도 아닌 옆 카페의-)


“둘이 싸우셨어요? 왜말도 안하고 앉아서 책만..”

“이따 맥주하러오세요! 공짜입니다.”


우리가 들으려고 찾아가 귀를 귀울이지(Listening) 않았지만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Hearing)였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처럼 따르는 그 길을 가지 않고 바보 같이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우리가 오죽 답답했을꼬. 또한 탁월한 사업가인 그는 게스트하우스 파티 인원 충원을 위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꽤 흥미로워보이는 제안을 한 것이다.


-

세상은 들리는 것과 들으려는 것 사이에 놓인 우리의 감정과 선택이다.


단양역에 내려 도담은 내게 말했다.

“야 이렇게나 조용할 수 있냐.”

온갖 바쁜 소음이 사라진 이곳엔 바람과 강의 소리만이 가득했다.


인간은 Listening 이외에도 수 많은 Hearing 속에 파묻혀 살아간다. 지나가는 차 소리, 카페의 노래 소리,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또 사회적 알람은 그런 속에도 <굳이> 울려댄다. ‘군대가야지’, ‘연애해야지’, ‘취업해야지’, ‘결혼해야지’, ‘집은 얻어야지’, ‘애는 좋은 학교에 보내야지’, ‘연금은 들어야지’...


우리의 선택과 가치기준과 상관 없이 들려오는 소리들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귀가 있고 들을 수 있는 한 그것을 어찌 막으랴. 하물며 백색소음이라는 카페의 bgm조차 그 카페 밖을 나서며 따라 부르게 될만큼은 우리의 무의식에 남는것이 현실이고 인간이다.


-

#넌 어떤 소리가 잘 들리니?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같은 상황에서 같은 소리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라도 우리는 다르게 살아간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어떤 소리들이 잘 들리냐고.


나는 좋은 말이 더 잘들린다 그리고 조금 더 아프고 슬픈 이들의 말이 잘 들린다고 했다. 그래서 더 기쁘기도하고 더 슬프기도 하다. 도담은 자신은 무엇이 잘들리냐라고 질문을 받으면 당연히 부정적 소리들에 대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새롭고 놀랍다고했다.


날 향한 부정적인 말들은 정말 잘 들리지도 않고 금방 증발해 버리곤한다. 간혹 장난스레 이야기가 꺼내지긴하지만 실제 내 삶에 영향을 크게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부정적인 말이라 함은 날 사랑하는 이들의 충고나 토론하며 의견을 나눌 때 반대되는 생각 등이 아니고, ‘너 돈 더 안벌어도 되겠니?’ ‘그러다 진짜 결혼은 하겠니?’ ‘하나님이 뭘 해결해 주시는데? 너무 이상주의자야 넌’과 같은 걱정의 탈을 쓴 ‘흩어지는 말’들이다.


나는 이런 말들보다 오늘도 하나님이 너무 좋다는 말과 함께 책을 읽고 나누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말과 내가 너무 좋다는, 너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라는 말들이 훨씬 잘들린다. 새소리와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며 말을 거는 소리가 훨씬 잘들리고 기쁨을 준다.


혹은 베트남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교복이 없어 못가겠다는 아이의 말이, 여전히 친구들과 놀기 보다 전쟁에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아이의 한숨이 더 잘들리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27세로 누구는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매일을 갈비뼈가 으스러져라 몸을 끼어 타느라 공황장애가 유행이 되어버린 서울에 살고 있다. 특별히 돈이 더 많아서 많은 것을 살 수 있다거나, 철통밥통을 보장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


#무엇이었을까?


1. 들려지는 것(Hearing)은 결국 어떤 것들을 주의깊게 들으려고 했던 것들(Listening)의 축적된 산물이다.


성경은 말한다. 혼자 넘어지면 잘 일어서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눈먼 양이 잘 살아남는 길은 목자의 목소리를 잘 듣고 따르는 것이라고. 혹여나 평소 목자랑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서 내 목자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면, 양은 엄한 곳에 가서 고생하다 이내 그 생명을 잃게 된다.


내게는 어떤 소리가 들려와도 기준으로 삼고 그 들려진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진리’라은 가치기준이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모든 것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행동해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열심히 들어왔던 말씀은(Listening) 결국 청종(:솨마)을 이끌어내도록 도와준다.


2. 막을 수 없는 들려지는 것에 있어서 침묵으로 듣기보다, 더 크고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가끔은 춤까지 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소리가 이미 충분히 많은데, 거기다가 나까지 소리를 내면 너무 시끄럽지 않겠냐고.


그렇다면 이 세상엔 찬양의 소리가 종적을 감추고 - 다른 이들도 그것을 듣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 삶의 Hearing에 찬양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될 때가 있는 것 같다. 더 기쁜 노래를 들려주고 심지어 손 맞잡고 춤까지 추며 하나가 되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


결국 우리는 무엇을 들어 왔느냐에 따라 듣게 되는 것이고, 듣게 되는 것에 따라 느끼는 것을 적절한 소리로 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나의 소중한 이,

도담아, 너의 말처럼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인가보다.

‘하나’로 가기 위함인가보다.

우리가 불러야할 노래가 이것인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