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박 Oct 02. 2021

비밀기지적 상상력

19-1106



제주의 어느 서점에서 덜컥 사버린 책 한권에서 시작한 생각


책상 밑에 들어가서 앞을 의자로 막으면 가장 기본적인 비밀기지가 된다. 누가 봐도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만, 왜일까,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진 기분이었다. 이것이 공간 만들기의 첫 경험이다. 비밀기지는 누군가에게는 향수로 가득 찬 추억일 수도 있다. 어른들의 꾸지람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도피처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치유되었다. 또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비밀을 만들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에게 그 비밀을 공유한다. 전체를 향한 다부진 비밀이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공유다.


비밀기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사이(間)가 필요하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동료이다. 하지만 현재의 어린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시간이 없다. 쌓여가는 아파트와 도시 속에서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고 있는 현재의 아이들에게 비밀기지는 잊혔을까, 아니면 그 안에서도 새로운 비밀기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유대를 쌓고 추억을 만들고 있을까. 비밀기지는 놀이의 형태이면서 동시에 교육의 장이고 사회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장소이다. 집, 건물, 도시, 자연의 빈 공간이고 틈새이며 바깥 세계와 의도적으로 분리된 공간이다. 또한 비밀기지는 죽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고 활용이며 점유다.


어른들도 아이들과 똑같다. 그들은 비밀기지를 오랜 시간 잊고 살았지만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추억할 수 있다. 나도 분명 잊고 살았지만 '비밀기지 만들기'라는 책을 스르륵 넘겨 보고는 계산대로 향했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자리에서 전부 읽었다. 그 동네에서 친구들과 만들었던 비밀기지, 그 추억을 되돌아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앞에서 이야기한 비밀기지는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쉐어'라는 명목 하에 새롭게 드러나고 있었다. 공간을 점유하여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쉐어하우스, 쉐어오피스 등과 같은 형태는 주거시설이나 업무시설의 새로운 틈새이자, 고정적인 사회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비밀기지의 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비밀기지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주변 세상을 재구축하는 상상력,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었던 상상력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망각되었던 그 상상력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밀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