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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Feb 04. 2024

셋째 주의 밤들

2024.01.15-21


얇은 눈꺼풀 뒤, 둘 사이의 한 뼘

240115

우리 방 안에 누워 아무 말이 없고 감은 눈을 마주 보면 모든 게 우리 거야
-EVERYTHING, 검정치마

사랑하는 두 남녀가 두 눈을 감은 채, 그 두 눈이 서로를 향한 채 누워있는 모습을 보라. 자극이 같아서 아주 살짝 떨어져 있는, 결국엔 하나의 성질을 띄고 있는 두 남녀를 보라.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뼘, 서로의 숨 한 줌이 마치 봄날의 바람처럼 애틋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뼘, 살짝 굽힌 무릎만이 거의 닿을까 하지만 어느 무엇도 그 작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어리광 부리지 못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뼘, 두 눈을 감은 그들 사이에는 영원한 것이, 무한한 것이 흐른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두 눈을 감은 채, 그 두 눈이 서로를 향한 채 누워있는 모습을 보라. 얇은 눈꺼풀 뒤, 그리고 둘 사이의 한 뼘에는 모든 게 담겨있고 그 이불보는 한없이 따뜻하리라.


모래성

240117


물에 축축하게 젖은 모래성 같은 관계가 있다. 마르면 금세 부서질, 그리고 파도 한 번에 전부 휩쓸려내려 갈 그런 모래성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곁에 있는 모래성들은 대부분 녹아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계는 계속해서 새로이 쌓여가고 그중엔 바다 근처에, 위태롭게 쌓인 모래성도 분명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불안해한다. 함께 쌓아 올린 그 모래성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바람 같은 말들에 깎여나가고 파도 같은 말들에 형태를 쉬이 잃어버리는 모래성을 바라보며 속으로 감내한다. 언제까지 그 차가운 바다에 서서 그것을 온몸으로 막을 순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 모래들은 결국 손가락 사이사이로 전부 쏟아진다.


눈꽃

240119


눈꽃은 분명 피어났다. 나뭇가지를 따라 쌓인 것이 아니라 눈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흘러나와 그대로 꽃이 되었다. 무엇이 흘러나왔을까, 세 계절의 끝에서 흘러나온 고통 같은 것일까, 진물 같은 것일까. 혹은 상처 끝에서 단단해진 딱지 같은 것일까. 분명 아픈 것이 흘러나온 것 같은데 왜 이리 예뻐 보이는지, 모든 것을 다 져버린, 발가벗은 나무가 겨울에도 우리를 기쁘게 하려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하얀 꽃을 피운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에도 꽃을 본다.


미성숙한 감정들

240120


나에게는 미성숙한 감정들이 있다. 피하고 싶은, 나를 차갑게 가라앉게 하는, 성숙하지 못해서 쉽게 상처받는 그런 감정들 말이다. 페르소나에 의해 마음속에 쌓인 불순물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 갑자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사람에 의한 서운한 마음과 그 와중에도 내 실수를 찾으려 하는 약한 마음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무력함, 갈피를 못 잡고 그저 조각난 마음들. 이러한 미성숙한 감정들이 겉과 속을 태우고 있을 때에는 성숙하지 못한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다. 머리가 소란스러워서,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흘러나온 미성숙한 감정들의 편린은 꽤나 날카로워서 누군가를 상처받게 할 수도 있고 나는 다시 그것을 걱정한다. 허공에 흩어진 말들을 돌아서서 하나씩 주워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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