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이 내려앉은 곳에서

영화 - ‘청설’

by 밤박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늘 아름답다. ‘각인’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가 새겨진다. 그의 몸짓을 따라 시선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곳이 어딘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주위에 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혹여나 그의 움직임을 놓칠세라, 그의 몸 어딘가에 시선을 동여매어 놓는다. 각인의 잔여물들이, 파내지고 남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서 그런 것일까, 나에게만 중력이 아주 조금 덜 작용하는 것 같다.


두 남녀가 마주 보고 걷는다. 누군가는 뒷걸음질 치며 걷는다. 각자의 눈은 상대방의 손짓과 표정을 해석하기 위해,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삐도 옮겨 다닌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세계가 펼쳐진 것만 같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만 무수한 사랑의 몸짓과 미소가 그 세계를 가득 메운다. 길거리의 모든 남녀들이 마주 보고 걷는 상상을 한다. 마주친 눈은 흔들리는 몸과 펄럭이는 손짓, 입가의 미소들을 전부 담아내겠지. 그렇게 수많은 세계가 드러나겠지.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의 온도를 가지고 있다면..


청설(聽說), 들을 청에 말씀 설(원작). 나에게서 출발하여 그대에게 닿는 모든 것.

소리를 가진 문장이 아니어도, 사랑을 품은 문장은 손에서, 표정에서, 몸짓에서 출발하여 그대의 눈에, 기억에, 마음 어딘가에 꼭 닿는다.


청설(靑雪), 푸를 청에 눈 설. 푸른 눈.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푸른 눈을 상상했다. 있을 수 없는 일, 존재하지 않는 것. 쉬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 사랑이 그렇다. 마치 푸른 눈 같은 그것.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되돌아간다.

푸른 수영장, 그 옆을 걸어가는 그녀.

그런 그녀를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는 남자.

푸른 수영장, 마치 푸른 눈이 뒤덮인 것만 같은, 그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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