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덧없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by 밤박


책 속에 쌓여져 있던 모든 이야기가 단 한마디에 의해 전부 불타버린다.


서로 접촉하여 온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 천천히 멀어지는 사랑에 지쳐갔던 폴의 이야기가, 익숙함에 속아 긴 밤 속에 사랑하는 여자를 혼자 놓아둔 채로 떠나버렸던 로제의 이야기가, 텅 빈 채로 살아오다가 그 삶의 이유가 한 여자에게 당도해 오로지 그녀를 위한 삶을 살 준비가 되었던 리옹의 이야기가, 이 모든 이야기가 단 한마디에 의해 전부 불타버린다.


속에서부터 곪아버린 권태가,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은 것처럼 들끓던 맹목적인 사랑이, 늘 자신을 비춰주던 그녀가 부재하는 세상 속에서 느꼈던 지독한 상실감이, 결국 쌓아올렸던 기억의 탑 앞에서 무릎 꿇고 다시 되돌아가게된 선택이, 마치 아무 쓸모없이 타오르는 시커먼 장작인 것처럼 부스럭거리며 사라진다.


사랑의 덧없음.

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고민했던 ‘그래서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결국엔 이런 답을 했었다.


내가 나를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게,

그리고 너가 너 자신에 대해 스스로 물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나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감싸놓은 거짓의 피막들을

너의 앞에서만 벗어둘 수 있게 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함께 했던 시간들을 녹여서 만든 둘만의 그림이 어느 하나의 색깔로 칠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색깔이 얼룩덜룩 칠해진 그림을 보고 정말 근사하다며 미소짓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아직 사랑의 덧없음을 믿지 않는다.

아직 내가 믿는 사랑이 존재하기에 나는 그것을 쉬이 덧없다고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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