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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Sep 10. 2024

나의 사랑하는 부산_04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이 얼마나 예쁜 이름인지!

연제, 연산... 그 사람 차로 이동하다 당시 공사 중이던 ‘레이카운티’ 옆을 지나는데 가설 가림막에 씐 '연제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뭐 이런 예쁜 지명이 다 있지? 어떻게 이렇게 예쁜 글자들로 조합되었지? 어떤 뜻이길래, 이곳은 어떤 곳이길래 이런 이름이 붙은 거지?


일단, '연제'는 연꽃 연(蓮)과 둑 제(堤)를 쓴다. 연제구의 관할구역인 연산동과 거제동에서 한 글자씩 따와 만든 거다. 그럼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부분, '거제'와 '연산'은 또 무슨 뜻인가!

먼저 클 거(巨), 둑 제(堤)가 모인 '거제'는 조선시대까지 '동래군 서면(西面) 거벌리(居伐里)'라 불렸다고 한다. 거벌은 '큰 벌판'을 의미하며 일제강점기 시기 상습 침수 지역이었던 동래천에 제방을 쌓았는데 '큰 제방'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옛 이름과 비슷하게 '거제'라 이름 짓게 된 것이다. 지금 제방은 없다.

한편, 연꽃 연(蓮), 산 산(山)이 모여 만들어진 '연산'은 마을의 낮은 늪지대에 수련이 많고 동남쪽의 배산(盃山)과 황령산(荒嶺山) 쪽이 산지로 되어 있어 지어졌다는 설(說)과 지역 남쪽에 위치한 금련산(金蓮山)에서 동네가 시작되었다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산 자체가 연꽃의 형상을 닮아 금련산이라 이름 지은 것이니 연꽃과의 관계는 필수불가결인가 보다.


조선시대까지의 기록에는 '연산'이라는 지명이 없다. 인근 지역이 서면의 거벌리와 거평리, 대평리, 대조리, 읍내면의 안락리와 율부리 등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가, '조선 지지 자료(朝鮮地誌資料), 1910(추정)'에서 처음 '연산리'라는 명칭이 나왔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부터 부산부 읍내면의 신락동과 안락동을 합쳐 '동래면 연산리'에 편입한 후, 1995년 넓은 동래구를 연제구로 분구하면서 연산동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산동은 배산(盃山)을 중심으로 황령산(荒嶺山)과 금련산(金蓮山)을 잇는 산지가 연결돼 있고, 화지산(和池山), 온천천(溫泉川)이 동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다양한 브랜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선 살기 편한 주택가로 부산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나리꽝과 논밭으로 가득했고, 저습지가 많아 실제 생활은 불편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거제동에 제방이 설치되고 철도가 다니면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70년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며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부산광역시청이 이곳에 있고 부산지방경찰청, 연제구청, 부산의료원 및 교육 연수원, 국세청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래'와 '서면'을 잇는 '중앙대로'와 여러 방면으로 통하는 간선 도로들의 교차점 '연산로터리'가 여기 있어 그야말로 부산의 중심지라 할 수 있겠다.


수련과 산이 많고 거대한 제방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니. 인프라 좋고 교통 편리한 번화가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름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 좋고, 어감도 좋고 글자도 예뻐 좋다. (이러는 거 보니 나 '연'자를 좋아하네...ㅎㅎㅎ)

확실히 자연, 특히 꽃을 좋아하는 나에겐 취향저격인 셈이다. 이름도 어여쁜 수련이 가득했던 곳! 이곳 금련산 자락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 '아도화상'이 세운 '마하사(摩訶寺)'라는 절이 있다. 부산 최초의 절인 마하사의 '마하'는 고대 인도 산크리스트어로 '훌륭한, 존귀한'이라는 뜻으로 '수리수리 마-수리'의 '마-'와 같다고 한다. 이 절에는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은 16인의 제자를 일컫는 '아라한(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이들의 신통력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조선시대 초엽, 공양스님이 동짓날 팥죽을 쑤러 부엌에 갔으나 화로에 묻어둔 불이 없어 일단 팥을 씻어 솥에다 앉혀 놓고 화로 불을 얻으러 아랫마을 갓직이(산 지키는 사람)네 집에 갔다. 그랬더니 조금 전 상좌(수행기간이 긴 수행자, 혹은 승려) 아이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주고 쑤어 놓은 팥죽도 주었더니 먹고 갔다는 것이 아닌가! 그 절에는 상좌 아이도, 불 심부름을 보낸 일도 없는데 말이다. 기이히 여기며 돌아와 보니 화로에선 불이 활활 타고 있어 팥죽을 잘 쑤었고, 이를 나한전에 올리러 갔는데 셋째 나한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동자로 화신하여 팥죽을 쑤도록 도운 것이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어느 날 주지 스님이 뜰에 벼를 널어놓고 외출했다 돌아왔는데 참새 떼가 넣어놓은 벼를 먹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어찌 새가 먹게 내버려 두신 겁니까!" 하고 말했더니 이후로 마하사 주변엔 참새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가 18-19세기 단계적으로 복원되었다고 하며, 연제구청에서 지정한 8경에 속하는 명소 중 하나로 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불상들이 보존되어 있다.


부산 인프라의 중심으로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과 세련된 아파트도 많고. 시간이 멈춘 듯한 196-70년대 지어진 오래된 주택들도 즐비해 있어 그야말로 레트로와 모던이 공존하는 부산다운(?) 곳이다. 최근 연제구에서 지역상권 홍보사업의 일환으로 다양한 맛집이 가득한 거리를 ‘오방맛길’이라 이름 짓고 홍보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밤에는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유흥가로 탈바꿈하는 건 덤. 그래서인지 숙박업소도 많...다..

부산을 방문하던 초창기 및 연애 초 무렵, 해운대나 광안리 같은 관광지를 중심으로 데이트를 하다가 이제 나도 현지인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머물렀던 곳이 바로 연산동이다. 깔끔한 비즈니스호텔에 숙소를 잡고 짐도 그 사람도 차도 놔둔 채,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마냥 대중교통과 택시, 도보로 이곳저곳 맛집도 가고 유명하지 않은 동네 작은 카페도 가고 오락실에서 추억의 게임들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어느 해 그 사람 생일날, 거제도로 드라이브를 가던 중이었다. 거제대교 초입에 다다랐는데 그 사람 차가 갑자기 이상한 거다. 정차하고 보험사에 연락했더니 견인차가 왔고, 그 사람 단골 정비소가 연산동이었던지라 견인차 기사님 옆 자리에 함께 앉아 갔다. 차 정비를 맡기고 걸어서 유명 식당에서 돼지갈비를 먹었다. 그 사람의 생일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봄의 한가운데 있다. 고기가 가득 들어 황령산만큼 불러온 배를 꺼트릴 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씩 들고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평지도 많고 오르막길도 많아 걷기 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 밤공기가 참 행복했다. 마치 신혼부부가 어느 주말 외식하고 집까지 도란도란 산책하는 것 같아서 설렜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오른쪽 갈비뼈 아래 부근이 괜스레 뻐근했었다. 불안함이었던 것 같다. 복선이었는지 그러고 3개월 후 우리는 헤어졌다. 사람의 촉이란 참 신기하리만치 잘 들어맞는다.

'한계를 넘어선다'는 말을 좋아한다. 발전과 성숙으로 가는 지점인지라 뛰어넘는 것이 쉽지 않다. 중도포기자가 속출한다. 우리에게도 그때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실시간으로 연락하긴 했지만 단지 랜선 연애일 뿐, 오프라인은 감질맛 나는 만남의 연속이었던지라 늦게 찾아온 권태기였을지도 모른다. 열정에서 안정기로 접어드는 그 과도기를 넘어서질 못했다.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 접점을 찾는 것도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너무 지쳐 의지가 상실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의지보단 자신이 없다.


요즘은 '자갈에 구워주는 삼겹살'을 먹으러 가거나 차로 이동 중에 지나치지 않으면 갈 일이 잘 없는 곳이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기에 특별한 용건이 있거나 부산 시민이 아니면 흘려보내기 쉬운 지역이지만 부산의 지명들을 눈 여겨보게 된 가장 예쁜 이름을 가진 곳, 연산동! 조만간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커피 한 잔 마시러, 추억을 곱씹으러 방문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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